“호주 최대 은행인 코먼웰스은행(Commonwealth Bank of Australia·호주연방은행)이 ‘이노베이션 랩(Innovation Lab)’을 홍콩에 설립하기로 확정했습니다. 이 은행이 해외에 이노베이션 랩을 여는 것은 처음이죠.”

홍콩 번화가의 고층 빌딩 중 하나인 페어먼트하우스 25층. 지난 12일 만난 찰스 응(吳國才) 인베스트HK(投資推廣署·HK는 홍콩 이니셜) 부총괄은 유창한 영어로 홍콩의 핀테크 사업과 스타트업 현황을 설명했다. 그는 외국 기업의 홍콩 투자 촉진 업무를 맡고 있다.

응 이사의 보좌진들은 홍콩이 왜 최적의 투자처인지를 설명하는 50장이 넘는 인쇄물을 건넸다. 대부분의 자료는 영어로 돼 있었지만, 홍콩 내 한국기업의 현황을 소개하는 자료는 한국어였다. 한국 기업인 휴머스온(이메일 마케팅업체)이 홍콩에 아시아태평양 본부를 두고 중국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는 별도의 보도자료도 들어 있었다.

홍콩 최대 번화가인 타임스퀘어 주변 거리

1인당 국민소득 3만9800달러에 달하며 남부러울 것 없었던 홍콩이 이제 스타트업과 정보기술(IT)에 목을 매고 있었다. 홍콩 경제를 탄탄하게 떠받쳤던 금융과 물류 기능을 주변 도시에 빼앗기면서 홍콩 정부의 위기감이 커졌다.

10년 전만 해도 홍콩은 아시아의 물류 허브였다. 넘볼 수없는 ‘난공불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하이, 싱가포르, 선전, 닝보·저우산에 밀리고 있다. 영국계 컨설팅그룹 Z/YEN이 지난 8일 발표한 국제금융경쟁력 순위에서 뉴욕, 런던에 이어 3위 자리를 꿰찬 곳은 홍콩이 아니라 싱가포르였다. 홍콩은 지난해보다 순위가 한단계 내려간 4위였다.

홍콩 정부가 내놓은 전략은 ‘재산업화(Reindustrialization)’였다. 재산업화란 IT와 각종 산업을 결합해 새 비즈니스 모델을 탄생시키는 산업화의 새 물결을 뜻한다.

홍콩 정부는 금융과 IT를 접목해 핀테크 허브를 만들고, 세계 공장으로 불리는 중국 선전에 인접해 있다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사물인터넷(IoT) 중심지가 되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여기에 중국 공장과 차별화할 수 있도록 로봇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첨단 제조 공장에도 대규모 투자를 예고했다.

◆ 렁춘잉, 행정부에 ‘혁신기술부서’ 신설...비자는 7일 만에

2015년 11월 홍콩 정부는 우리나라 미래창조과학부에 해당하는 행정부서인 창신과기부(創新及科技局·Innovation and Technology Bureau)을 신설하고 대규모 예산을 편성했다. 연구개발과 기술 혁신에 관한 국가 전략을 총괄하는 부서 신설은 홍콩 4대 행정장관(자치수반)인 렁춘잉(梁振英)의 숙원이었다. 부서 신설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데 3년 걸렸다.

출범한 지 4개월 된 창신과기부의 공무원들은 홍콩을 첨단 기술 단지로 바꿀 계획을 짜느라 여념이 없었다. 금융, 물류, 관광, 전문 법률 서비스 등 4대 서비스 부문이 홍콩 내 총생산의 50%를 차지하고 있다. ‘서비스 도시’ 홍콩이 왜 기술에 투자하냐고 물었더니, 알렌 영(杨德斌) 홍콩 정부 최고정보책임자(GCIO)는 “기존 산업의 질서를 바꾸는 디스럽티브 기술(Disruptive technology)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지 않으면, 4대 서비스 부문의 성장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니콜라스 W 양(楊偉雄) 창신과기부 초대 장관은 “서비스 분야만으로는 젊은이들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줄 수 없다”면서 “우리 경제를 다원화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4월 11일 홍콩섬 완차이 홍콩컨벤션전시센터에서 열린 ICT어워드에서 니콜라스 W 양(楊偉雄) 창신과기부 장관이 부문별 스타트업 수상자에게 상을 주고 있다.

홍콩 정부 관료 사이에서는 ‘기술이 새 경제 질서(new economic order)’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창신과기부가 국회에서 예산을 딸 때도 이 말을 썼다. 이제 외국인이 홍콩에 창업하면, 비자는 7일 만에 나온다. 인베스트HK가 특별 보증을 해주기 때문이다. 예전엔 두달 넘게 걸렸다.

홍콩 정부는 2022년까지 82억 홍콩달러(약 1조2137억원)를 투자해 홍콩 산업단지 청관오(將軍澳)를 최첨단 로봇을 이용해 제조하는 단지로 탈바꿈시킨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핀테크, IoT, 스타트업에, 중장기적으로는 스마트시티, 로봇, 헬스에이징(건강한 노화)에 투자한다는 게 홍콩 정부가 그린 큰 그림이다.

◆ "지리적 이점에 세금 적고 번 돈 마음대로 가져가고"...홍콩 정부 "우리가 답"

홍콩 정부의 의지는 4월 11일부터 23일까지 2주일간 홍콩섬 완차이 홍콩컨벤션전시센터에서 열린 ‘제4회 국제IT전(International IT Fest)’ 곳곳에서 확인됐다.

홍콩 정부가 주관하는 이 행사에선 다양한 부대 행사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렸다. 홍콩 정부는 예년 이맘 때 열리던 홍콩전자전에 ICT엑스포, 콘퍼런스, ICT어워드 등 50개 행사를 붙여 국제IT전으로 규모를 확 키웠다. 올해에는 황장지(K.K.웡) 샤오미 창업자 등 중국 IT 거물을 연사로 내세운 ‘인터넷경제 서밋(internet ecomony summit)’도 열었다.

황장지(黃江吉) 샤오미 공동 창업자(맨 오른쪽)가 13일 홍콩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인터넷 경제 서밋 2016’에서 ‘IoT 기회들’이라는 주제로 토론하고 있다.

홍콩은 주강 삼각주(홍콩, 선전, 마카오를 연결하는 삼각지대)의 중심에 있다. 세계 공장이 밀집해 있어 중국 내에서도 GDP(국내 총생산)이 가장 높은 선전(深圳)이 홍콩에서 1시간 거리에 있다. 홍콩 4개 명문 대학은 중국 선전 난산(南山) 첨단 기술단지에 산학연 연구시설을 두고 있다.

홍콩 정부는 이런 지리적 강점에 과실송금(果實送金) 등 선진화된 제도를 계속 강조했다. 홍콩 공무원들은 “중국에서 사업하면 번 돈을 마음대로 가져갈 수 없고 지적재산권도 보호받지 못하지 않느냐”면서 “중국에 진출하더라도 홍콩을 거쳐 가는 게 답”이라는 말을 공공연히 했다. 실제로 헤리티지 재단(Heritage Foundation)의 2016년 경제자유도 지표에서 홍콩은 1995년부터 20년간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경제 시스템을 갖춘 곳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홍콩 정부는 공식석상에서 ‘일국양제’라는 표현을 쓴다. 렁춘잉 장관은 13일 열린 ‘인터넷경제서밋 2016’ 개회사에서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체)’ 아래 중국 본토와 다른 나라를 연결하는 ‘슈퍼커넥트(super-connects)’가 된 홍콩이야말로 재산업화 조류에 올라타는 최고의 위치에 있다”면서 “홍콩은 탄탄한 법률 시스템, 견고한 지적 재산권 보호, 정보의 자유로운 이동, 유수 대학의 연구 인력 등 강점이 있다”고 말했다.

◆ 홍콩 스타트업 만나보니, 중국·호주·인도 출신까지 ‘다국적 군단’

2015년말 기준 홍콩의 스타트업 수는 1558개로 전년 대비 46% 가량 증가했다. 몇 년 전만해도 스타트업들이 일할 수 있는 코워킹 스페이스(co-working space)는 4~5곳 밖에 없었지만, 최근에는 40개가 넘는다. 싱가포르 최대은행인 DBS를 비롯해 스탠다드차터드은행, 홍콩 동아은행(BEA) 등은 핀테크 전문 액셀러레이터를 홍콩에 뒀다.

홍콩에서 만난 창업가들. 홍콩은 물론 인도, 호주, 중국 본토에서 온 사람이 많았고 한 스타트업 내에서도 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완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무케시 붑나 모넥소 창업자, 페인 후왕과 셰럴 정 에이비 창업자, 조지 하랩 비트파크 창업자, 케빈 호 홀리스틱테크놀러지 창업자

홍콩 스타트업은 지역 특색 때문에 다양한 국가에서 온 창업자들이 많았다. 14일 만난
비트파크 공동 창업자 조지 하랩(Harrap)은 호주에서 왔다. 그는 우크라이나에서 사는 프로그래머들을 고용해서 가상화폐 비트코인을 활용해 동남아 시장의 작은 가게들이 해외 송금 수수료를 내지 않고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는 거래 시스템을 만들고 있다.

개인과 개인이 돈을 빌려주는 P2P(Peer to Peer) 대출 기업 모넥소(Monexo)를 만든 무케시 붑나(Bubna) 창업자 겸 CEO는 인도 출신이다. 그는 시티은행에서 20년간 근무한 관록을 바탕으로 대출 시장에 진출했다. 붑나 CEO는 은행원으로서 퇴직할 나이인 50대에 창업해 30대 1을 뚫고 홍콩 정부의 스타트업 지원 기관인 사이버포트에 입주했다. 사이버포트는 월세 800만원 상당의 공간을 2년간 무료로 스타트업에 제공하기 때문에 입주 경쟁이 치열하다.

첨단 기업들이 몰려 있는 홍콩 과학단지인 사이언스파크에도 창업 후 1년간 공간을 무료로 제공하는 곳이 있다. 여기서 만난 스타트업 에이비(aivvy)의 멤버 대부분은 중국 본토 출신이었다. 스마트 헤드폰을 만드는 이 회사의 셰럴 정(Zeng) 매니저는 “홍콩은 선전에서 가까워 물건을 만들기 쉽다”면서 “중국 본토에서는 구글 행아웃이나 페이스북 메신저가 안되기 때문에 온라인 마케팅을 위해서 홍콩에 둥지를 틀었다”고 말했다.

◆ 거인의 등에 올라탄 홍콩, 역동성 확보가 관건

미국 뉴욕에 본부를 둔 액셀러레이터 실리콘드래곤이 홍콩에서 주최한 ‘실리콘드래곤 홍콩 2016’에 젊은 창업가와 투자자들이 몰렸다.

홍콩에 거주하는 전문가들은 대체로 홍콩 정부의 ‘재산업화’ 전략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다만 홍콩이 실제로 기술 중심의 혁신 도시로 변화하는 데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여전히 회계나 의료 등 안정적으로 돈을 많이 버는 직종에 똑똑한 젊은이들이 몰리기 때문이다.

회계사 출신의 창업가 캐빈 호 홀리스틱테크놀러지 마케팅 이사는 “회계사일 때 월급이 8만홍콩달러(약 1175만원)에 달해 창업을 결심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임우영 홍콩과기대 교수는 “홍콩은 전통적으로 금융 허브로서 각광을 받았지만, 최근 싱가포르와 상하이 금융 시장의 성장으로 역할이 줄어든 게 사실”이라면서 “인프라와 제도를 정비해 중국 IT 산업의 창구 역할을 하려는 홍콩 정부의 성장 전략은 인접 도시 중국 선전의 성장 속도로 볼 때 훌륭한 전략으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조 소(蘇競釗·Joe So) 화웨이 엔터프라이즈 비즈니스 그룹 최고기술책임자(CTO)는 “내가 홍콩 출신이라 홍콩에 대한 애정이 많지만, 홍콩은 하루하루의 안정적인 삶에 안주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도시가 돼 안타깝다”면서 “지금 중국의 선전은 20년 전 에너지가 넘쳤던 홍콩처럼 새로운 일을 하는 데 무섭게 달려드는 역동적인 도시여서 홍콩과 비교된다”고 말했다.

홍콩 한 대학 컴퓨터학과 교수도 “전통적으로 홍콩 젊은이들은 고연봉을 보장받는 회계나 금융 직종, 의학 관련 전공을 선호해왔다”면서 “얼마나 빨리 첨단 기술 기반 인력을 확보하느냐가 홍콩 정부의 새 성장 전략이 성공하느냐의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