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델리티, 블랙록, 얼라이언스번스틴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자산운용사들의 한국 사무실이 입주해 있는 서울 광화문 서울파이낸스센터에 최근 감원(減員) 바람이 몰아치고 있다. 이들 외국 운용사들이 국내에서 수년째 줄줄이 적자를 내면서, 본사 차원에서 한국 사업 축소 결정을 내린 것이다. 골드만삭스자산운용이 한국 진출 5년 만인 지난 2013년 "한국 펀드 시장에 미래가 없다"며 폐업을 선언하고 떠난 이후 겨우 버텨오던 외국사 중에 한국 사업을 접고 떠나는 곳이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외국계 자산운용사 3곳 중 1곳 적자

20일 금융투자협회가 집계한 외국계 자산운용사들의 지난해 영업실적을 보면, 총 22개사 중 7곳이 적자를 기록했다. 프랭클린템플턴, 피델리티자산운용이 18억원대, 얼라이언스번스틴과 JP모간, 노무라이화자산운용 등이 5억~7억원대 적자를 냈고, 부동산 전문 라살자산운용은 31억원이 넘는 영업손실을 공시했다. 템플턴의 경우 2009년부터 지난해까지 7년째 내리 적자 상태다. 지난 2012년 말 기준 5조원이 넘는 수탁고를 보유했던 슈로더자산운용은 현재 절반 수준인 2조4000억원대 수탁고를 기록 중이고, 피델리티자산운용 수탁고도 같은 기간 2조3000억원대에서 현재 1조5000억원대로 떨어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외국계 운용사들이 잇달아 비용 감축에 나섰다. 피델리티가 지난해 말부터 올 1분기 사이 약 20%의 인력을 구조조정했고, JP모간은 10%를 줄였다. 블랙록과 템플턴 등도 현재 인력을 줄이고 있다. A운용사의 한 임원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외국계 회사 직원이 파이낸스센터 빌딩에서 잘 보이지 않으면 으레 '집에 갔나 보다' 한다"며 "나도 지금은 일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언제 자리를 정리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들 외국계 회사의 아시아태평양지역 지사 중 한국 시장의 규모가 많이 늘어나지 않는데다 실적까지 나빠 구조조정을 촉발하고 있다. 호주·홍콩·싱가포르 등은 금융시장이 성숙하고 거래 규모가 커서 거점으로서 중요 역할을 하고 있고, 중국 본토시장은 폭발적인 성장성 때문에 별도 전략지역으로 분류하고 있다.

"한국은 외국계의 무덤"

미국·유럽 등 금융 선진국의 유명 자산운용사들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에 한국 펀드 시장이 폭발할 무렵 한국 시장의 성장성을 보고 줄줄이 진출했다. 미래에셋자산운용이 공모펀드 붐을 일으켜 2008년 8월 주식형 공모펀드 시장이 144조원까지 커졌을 때 신한BNPP의 '봉쥬르차이나', 슈로더의 '브릭스', 템플턴의 '그로스' 펀드 등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그러나 금융위기로 공모펀드 시장에 환매가 밀려들고 최근에는 시장 규모가 63조원대로 절반 이상 줄어들면서 외국계의 입지가 가장 먼저 흔들리고 있다.

1차 원인은 펀드 수익률이 국내 운용사보다 상대적으로 뒤처지기 때문이다. 외국 회사들의 일부 고배당주 펀드를 빼면 최근 1년간 돈을 벌어다 준 펀드를 찾기 어렵다. 설정액이 2000억원 이상인 '슈로더유로', 'JP모간러시아', '슈로더브릭스', '블랙록월드광업주', '이스트스프링 차이나드래곤A주' 같은 대형펀드 대부분이 마이너스대 수익률을 기록했다. 이들 회사의 국내 운용역들이 만든 국내주식형펀드는 토종 운용사가 만든 펀드에 비해 수익률이 나은 게 없다.

외국 운용사들은 이런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한국 금융제도가 외국사들이 영업하기에 불합리한 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에 지사가 진출해 있어도 '판매 라이선스'가 없기 때문에 국내 은행이나 증권사의 요청이 없으면 본사 차원에서 지사를 통한 기관 영업활동을 할 수 없다. 최근 해외주식형펀드 비과세 제도가 열리긴 했지만, 3000만원 한도로 내년 말까지 한시적으로 가입할 수 있어 역시 미흡하다는 입장이다. C운용사 대표는 "은행이 계열 운용사 펀드를 열심히 팔아주는 문화가 뿌리 깊은 한국에서는 정말 장사하기 힘들다. 어쩌면 (일찍 판단하고 떠난) 골드만삭스가 현명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