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卒 학력의 보험여왕 출신 첫 여성 임원

중졸 학력이 전부인 38세 종갓집 맏며느리. 25년 전만 해도 그런 평범한 전업주부가 대기업 계열 보험사에서 최초의 여성 임원이 되리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한화손해보험의 김남옥(61) 상무 얘기다. 김 상무는 한화그룹이 지난 연말 단행한 정기 임원인사에서 2년 만에 상무보에서 상무로 승진하면서 화제가 됐다.

지난 18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위치한 한화손보 강남본부에서 김 상무를 만났다. 사무실에 들어서니 ‘인(人)보장부문 전사 1위’ ‘보장성 부문 전사 1위’ ‘혁신성과 보고대회 대상’ 등 각종 상장들과 시상식 사진들이 가득찬 장식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가 걸어온 치열한 인생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난 1992년 신동아화재(한화손보의 전신)에서 보험 설계사 일을 시작한 김 상무는 2년 뒤 정식 직원이 됐고 이후 영업소장으로 발탁됐다. 이후 대리, 과장, 부장 등 전부 특진했다.

그는 “학벌은 그저 옷에 붙이는 장신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살았다”면서 “낮은 학력의 전업주부였지만 입사 이래 승진에서 단 한 번도 밀려본 적이 없다”고 자신있게 말했다.

김남옥 한화손보 상무는 ‘행복전도사’ 같았다. 그는 꿈을 가진 사람들에게 성공 DNA를 심어주겠다는 말을 반복해서 했다. 1등을 향해 달려야 한다는 말도 거듭했다.

−종갓집 며느리가 어떻게 보험사에 입사하게 되었나?

“설계사로 일하던 사촌언니의 따끔한 조언이 자극이 됐다. 어느 날 사촌언니가 ‘누구 엄마, 누구 마누라, 누구 며느리로 평생 살지 말고 네 이름을 찾아야 하지 않겠니’라고 했는데 갑자기 머리를 띵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38세라는 늦은 나이에 특채로 한화손해보험의 전신인 신동아화재에 입사했다. 중졸의 전업 주부여서 공채로 입사하긴 어려웠다. 이후 정말 죽기 살기로 일했다.”

−평생 한 번 받기도 힘들다는 연도대상을 11번이나 받았다. 비결이 궁금한데?

“흔히들 보험업계의 연도대상은 상품을 많이 팔아서 높은 매출을 낸 설계사들에게 주는 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관리자도 종합적 평가를 거쳐 연도대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나는 관리자 위치에 있을 때 연도대상을 받았다. 관리자는 매출 뿐 아니라 인력관리도 중요한 평가 대상이 된다. 나는 우수한 설계사를 우리 회사로 데려오는 ‘신인(新人) 도입’과 조직에 성공 DNA를 심어 동기를 부여하는 ‘인력 관리’에 능했는데, 이것이 상을 받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인력 관리를 어떻게 했는가?

“일종의 ‘어머니 리더십’이다. 어머니란 어떤 사람인가. 아무리 못난 자식이라도 무조건적으로 믿어준다. (나 역시) 실력이 뒤지는 직원도 자주 격려해주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곁에서 응원해줬다. 그랬더니 성과가 저절로 나왔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나이, 자격증 등의 기준이 있지만, 이런 조건보다는 그 사람이 꿈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도 살폈다. 꿈이 뚜렷하지 않거나, 꿈이 있지만 실천 의지가 없는 사람들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나는 꿈을 가진 사람들의 목표를 실현시켜주는 일에 자신 있다. 내가 직접 영입한 사람들 가운데 지금 억대 연봉을 받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직원은?

“나처럼 설계사로 입사했지만 관리자가 돼서 한화손보 정식 사원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마산, 창원 등 경남지역과 부산에서 20년을 근무했기 때문에 이 지역에 많이 포진해 있다.

설계사를 하고 싶다면서 찾아오는 평범한 전업주부들이 많았다. 늦은 나이에 일을 시작했던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오른다. 일일이 실명을 열거할 순 없지만, 그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푸근해진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 한화손보 강남본부에 위치한 김남옥 상무의 사무실. 책장에는 김 상무가 받은 상들과 시상식 사진, 언론 보도 내용 스크랩이 진열돼 있다.

◆종갓집 며느리의 근성… 새벽 1시까지 반찬 만들기도

김 상무는 끊임없이 전진하는 기관차처럼 우직한 사람이란 느낌이 들었다. “슬럼프는 게으른 사람에게 오는 것”이라며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김 상무의 가족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는 효부상을 받았을만큼 지극하게 가족을 보살폈다. “당뇨가 있는 시아버지를 위한 반찬을 따로 만들다가 새벽 1시에 잠이 들어서 출근하기도 했다”는 그는 ‘일하느라 가정에 소홀하다’는 타박을 듣기 싫어 더 열심히 식구들을 돌봤다고 한다.

−뻔한 질문이지만 해보겠다. 일과 가정 양립 어렵지 않았나?

“어렵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거동이 불편한 시할머니의 대소변을 3년간 받아냈다. 또 이후 11년 간 매일 아침을 당뇨가 심했던 시아버지의 인슐린 주사를 놓는 것으로 시작했다. 남들이 혀를 내두를만큼 매우 힘들었던 순간이지만, 이런 생활이 스스로를 더 강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이 삶을 가까이서 지켜본 두 아들과 며느리들에게 영향을 준 것 같다. 한 번도 ‘부모에게 잘 하라’고 말한 적이 없다. 내 생활이 그들에게 최고의 산 교육이 된 것 같다. 그런데 그 생활이 영락없이 행복했다. 남편은 언제나 고마움을 표현하면서 내말은 무조건 지지하고 믿어준다.”

−남편과는 떨어져서 지내나?

“남편은 결혼할 땐 공무원이었고, 사업도 좀 하다가 재향군인회에서 15년 정도 근무한 후 현재는 재향군인회 지역 회장을 하고 있다. 지역사회를 벗어날 수 없어서 하동에 살고 있다. 마산에서 지역 단장을 2006년부터 했으니, 주말부부로 살아간지 11년째다. 물론 그립지만, 좋은 점도 있다. 더 애틋하다는 것이다.”

−한화손보에서 이루고 싶은 최종 목표는?

“사장과 부사장 등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보다도, 나를 믿고 따르는 내 직원들 개개인이 일에서 성취감을 느끼도록 도와주고 싶다. 내가 관리하는 직원들은 FP까지 포함하면 거의 3000명인데 이들의 성공을 돕고 싶다.

언론 등에 나온 내 강연 내용을 보고 가끔씩 저 먼 지방에서도 올라와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다. 11살짜리 아이가 ‘상무님처럼 되고 싶다’고 쓴 편지를 받았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더 힘을 내서 앞으로 달려가야겠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