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빈 킹(Mervyn King) 전(前) 영란은행 총재가 얼마 전 ‘연금술의 종식(The End of Alchemy)’이라는 책을 냈다. 킹은 세계 경제가 글로벌 금융위기를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중앙은행 총재 중 한 명이다.

킹은 금융위기 극복 과정에서 자신이 한 일을 자랑하거나 변명하는 회고록을 쓰는 대신 글로벌 경제의 근본 문제를 다루는 무거운 책을 내놨다. 그동안 경제학에서 무시해왔던 ‘극단적 불확실성(radical uncertainty)’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게 특징이다.

‘불확실성’은 과거 통계 자료를 아무리 분석해도 그 확률을 알 수 없는 상황을 가리킨다. 확률을 계산할 수 있는 ‘위험(risk)’과 구분되는 개념이다. 경제학 모델은 계량(計量) 가능한 위험만 다루는 반면 현실 세계에선 미래를 점칠 수 없는 불확실성의 영향이 크다. 경제학이 금융위기 같은 돌발 사태를 예측하고 대책을 내놓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킹은 정확하게 계산하고 따지기 보다 ‘대충 맞는(roughly right)’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경험을 바탕으로 한 어림 짐작(rule of thumb)과 열린 마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교과서적인 해법,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최근 새누리당이 총선 공약(公約)으로 들고 나온 ‘한국판 양적완화’를 놓고 논란이 뜨겁다. 새누리당 공약은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이용해 기업 구조조정을 지원하고, 가계 빚 부담을 줄이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선진국 양적완화 정책이 장기 금리를 떨어뜨려 소비와 투자가 살아나도록 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는 것과 차이가 있다.

양적완화 공약은 일단 흥행 차원에선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정책 경쟁에서 야당의 경제민주화 공약에 밀리던 분위기를 뒤집었다는 평가가 잇따르고 있다. 공약 발표 이후 정치권과 학계·금융계가 시끌벅적 논란을 벌이는 등 여론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실제 시행 가능성은 의문이다. 우선 정부와 한국은행이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대놓고 반대하지 않더라도 “중앙은행이 검토할 사안”이라며 선을 긋는 모습이다. 여당이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관련된 이슈를 사전 협의 없이 불쑥 제기한 데 대해 한은 내부에선 부글부글 끓는 분위기다.

전문가들의 의견은 엇갈리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찬성보다 반대가 우세하다. 지금 우리 경제 상황에서 양적완화를 도입하는 게 적절한 지를 비롯해 시기와 방법을 둘러싼 의문과 함께 좀비기업 연명(延命)과 자본 유출 우려 등 부작용에 대한 지적이 많다.

새누리당의 공약 자체가 아직 설익은 상태여서 반론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저런 법적 논란은 차치하더라도 한은이 산업금융채권과 주택담보대출채권(MBS)을 인수해야 할 이유가 뭔지 분명치 않다. 구조조정을 지원하고 가계 빚 부담을 줄일 방법이 그것 밖에 없는지도 따져봐야 한다. 정책으로 시행하려면 다듬고 손질해야 할 부분이 많다.

하지만 양적완화 반대 주장도 허술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중앙은행 독립성 논란을 보자. 요즘은 통화정책의 목표가 인플레 억제에 국한되지 않고 성장과 고용 등 여러 영역에 걸쳐 있다. 중앙은행이 너무 많은 부담을 떠안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와 정치권이 통화정책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중앙은행의 역할이 달라진 만큼 중앙은행의 독립성에 대해서도 조금은 융통성 있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한은 스스로 달라져야 한다. 물가안정과 통화정책의 독립성만 따지는 것은 한은이 시대의 흐름에 뒤쳐져 있다는 증거다. 통화정책이 항상 뒷북만 치는 이유가 있다. 한은이 선진국 중앙은행의 절반만 따라갔어도 여당이 양적완화 공약을 내놓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유럽과 일본은 양적완화를 넘어 마이너스 금리 정책까지 도입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헬리콥터 머니’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중앙은행이 국채(國債)를 직접 인수해, 정부가 그 돈으로 인프라를 건설하거나 모든 가계(家計)에 일정 금액씩 나눠주도록 하자는 것이다. 말 그대로 헬리콥터에서 돈을 뿌리는 정책까지 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기축통화국이 아니기 때문에 양적완화도 하기 힘들다고 하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지 의문이다. 선진국들은 지도에 없는 길을 가고 있는데 우리는 언제까지 손 놓고 구경만 해야 하나. 지금 한국 경제가 그렇게 여유 있는 상황인가. 그렇다면 정부의 경제 실정(失政)을 따지고 비판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양적완화 정책은 앞으로도 그 필요성과 시기, 방안, 재정 확대 등 다른 대안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검토가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기존 경제학 해법이 먹히지 않고, 그래서 ‘대충 맞는’ 방안을 찾아 새로운 실험을 해야 한다는 데 대한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 그래야 양적완화를 둘러싼 논란이 진영(陣營) 논리에 오염되지 않고 의미 있는 결실을 맺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