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 고위관계자 "당혹, 사전조율 없었다…전례 없는 발상"
"선진국은 중앙은행이 정부 채권 직접 인수 못해"…우회적으로 불만 드러내

한국은행은 새누리당이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활용해 산업은행의 채권이나 주택담보대출증권을 직접 인수하자는 이른바 '한국판 양적완화' 총선 공약 발표에 대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한은은 사전 조율 없는 발표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법리 검토에 나서는 등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새누리당은 지난 29일 기업투자 활성화, 거시경제정책 운용 공약을 발표했는데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한은이 더 많은 역할을 하도록 하는 정책을 내놓았다. 기업 구조조정의 키를 쥐고 있는 산은에 더 많은 자금을 투입할 수 있도록 한은이 산은의 채권을 인수하도록 하자는 공약이다. 새누리당 강봉균 공동 선대위원장은 "중앙은행이 기준금리정책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시중자금이 막혀있는 곳에 통화가 공급될 수 있도록 통화정책을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참고기사
새누리당 "산은-수은 자본 확충해 기업 구조조정 지원"

또 새누리당은 한은이 주택담보대출증권을 직접 인수해 가계의 주택담보대출 상환기간을 20년 장기분할 상환제도로 전환하겠다는 공약도 같이 발표했다. 즉 중앙은행을 적극 활용해 막힌 '돈맥(脈)경화'를 풀겠다는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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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한은 동원? 발권력 활용한 유동성 공급으로 경제 뇌관 해결 노려

'돈맥경화'를 풀겠다는 새누리당의 공약에서 발권력을 갖고 있는 한은의 역할은 핵심적이다. 한국에서 화폐 발행권은 한은만이 갖고 있다(한국은행법 제47조).

복잡해 보이는 메커니즘은 사실 간단하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내려도 정책효과가 미미하니 자금 수요자에게 유동성을 공급하자는 구상이다. 강 위원장은 "3% 이상의 지속성장을 위해선 한은의 양적완화등 거시경제정책 운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금리에만 너무 매달리지 말고 미국이 했던 것, 일본이 했던 것, 유럽연합(EU)이 했던 것을 잘 보자"라는 말도 했다. 사실상 중앙은행이 시중에 돈을 푸는 양적완화(QE) 정책을 요구한 것이다.

양적완화 정책은 한은이 국채 등 다양한 금융자산을 매입해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기준금리 조정을 통한 '간접 조절'이 아닌 통화량을 늘리는 '직접 조절' 방식이다.

강 위원장은 구체적으로 주택담보대출증권(MBS)과 산업은행 채권(산은채) 인수와 같은 방법을 제시했다. 한은이 한국경제 뇌관으로 지목받는 한계기업 구조조정과 가계부채 문제 해결에 핵심역할을 하라는 주문이다.

강 위원장은 "한계에 달한 기업들의 구조조정이 성공하려면 국책은행들의 역할은 필수적인데 자금이 부족한 문제가 있다"며 "국책은행에 중앙은행이 유동성을 공급해주면 꽉 막힌 지금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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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은 "현재 한은법상 정부 채권 인수 불가능"

문제는 현행 한은법으로 산은채와 MBS 인수가 불가능하다는 것. 한은법 75조와 76조는 한은이 발행시장에서 직접 인수할 수 있는 자산을 국채와 정부보증채로 못 박아놓고 있다. 정부보증채는 국민주택채권과 한국장학재단채권 뿐이다.

한 한은 고위 관계자는 "한은법상 국채와 정부보증채만 직접 인수 근거가 있는데, 산은 채권과 주담보 대출 증권은 지금 한은법에 해당되지 않는다"면서 "지금 한은법으로는 어렵다"고 밝혔다.

또 다른 고위 관계자는 "현행 법규상 여당의 공약이 시행되기 위해서는 국회 동의를 얻어서 산은채나 MBS를 정부보증채로 만들던지 한은법을 고쳐서 인수 가능한 자산을 확대해야 한다"고 했다.

한은법을 개정한다고 해서 곧바로 산은채와 MBS를 인수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한은 관계자는 "정부가 상환을 보증하는 채무만 인수할 수 있다는 게 한은법의 취지인데, 법적으로 가능하더라도 실제 인수할 지 여부는 금통위가 결정하는 것이 때문에 별도의 정책적 판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발행시장이 아니라 유통시장에서 인수한다면 과정은 한결 간단해진다. 한은이 금통위 의결을 거쳐 산은채 등을 공개시장조작 대상 증권으로 지정하면 인수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통시장에서 인수하는 방안은 산은에 대규모 자금을 공급하겠다는 강봉균 위원장의 구상처럼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유통시장에서 인수하는 것은 기존 채권 보유자들에게 산은채를 매입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규모 발행에 따른 금리상승을 억제해서 시장을 안정시킬 수는 있지만, 산은에 구조조정 실탄을 공급하는 효과는 일어나지 않는다"면서 "강 위원장의 구상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고 말했다.

◆ "선진국은 중앙은행이 직접 정부 채권 인수 못해…시장교란 우려도"

한은에서는 이번 여당의 양적완화 정책에 대해 우려하는 시선이 많다. 사전 조율이 없었다는 절차적 문제 외에도 그 정책적 효과와 예상되는 부작용에 대한 우려다.

한은 고위 관계자는 "당장 곤혹스러운 게 사실"이라며 "협의라던가 채널 가동 같은 사전 조율 없이 발표돼 당장 무슨 입장을 내놓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어 "정치권에서 얘기했다고 해서 독립기관인 중앙은행이 바로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라며 불쾌함을 드러냈다.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동원해 정부 채권을 인수해 유동성을 공급하는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시선도 존재했다.

또 다른 한은 관계자는 "선진국의 경우 중앙은행이 직접 정부의 채권을 인수하지 못하게 돼 있다. 정부여당이 중앙은행을 동원해 유동성을 공급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합의가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은의 독립성 침해 지적이 있다'는 질문에 대해 한은 고위 관계자들은 "통화정책 내용까지 정치권이 공약으로 내거는 것은 전례 없는 일"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발휘해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은 바람직 않다" "정책적으로 과연 필요한 일인지 검토가 필요하다" 등의 반응을 내놓았다. '선비' '신사'로 불리는 한은 스타일을 감안하면 상당히 거친 언사다.

양적완화 정책이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문제도 있다. 중앙은행의 발권력에 의존하는 양적완화 정책은 리스크가 크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대규모 양적완화 정책을 실시한 미국에서는 효과를 냈지만, 일본과 유럽에서는 큰 성과가 없었다.

자칫 원화의 과도한 공급은 가치를 떨어뜨려 장기적으로 인플레이션을 부를 가능성이 있다. 원화가 기축통화가 아니라는 점도 걸림돌이다. 아직 금리 인하 카드를 활용할 여력이 있다는 점도 미·일 등과 다르다.

시장기능을 약화시킨다는 지적도 있다. 한은 고위 관계자는 "정부가 일방적으로 한은 발권력을 동원해 시장에 개입할 경우 오히려 시장기능이 교란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