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법 기관이 범죄자의 신상을 확인하기 위해 민간 유전자 정보 분석 업체에 개인 유전 정보를 요청하는 일이 잇따르자 개인 프라이버시 침해 논란이 불거졌다.

29일 외신에 따르면 미국의 유전자 분석 기업 ‘앤시스트리닷컴’과 ‘23andme’는 각 회사의 유전자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유전자 정보를 제출해 달라는 사법 당국의 요청을 최근 2년간 5차례나 받았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미국 현지에서 법의학 전문가와 프라이버시 전문 변호사들이 개인의 유전자 정보가 사법 기관에 의해 오용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며 우려를 제기했다.

◆ 유전자 분석 비용 싸지자 개인 유전자 정보 DB 구축 가능해져

사법 기관이 유전자 분석 기업에 유전 정보를 요청하는 것은 민간 기업이 보유한 유전자 정보 데이터베이스 규모가 커져 범죄 수사에 활용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사법 기관은 일반적으로 유죄 선고를 받은 범죄자의 DNA 샘플을 관리한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유전 정보에 접근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범죄 현장에서 나온 DNA 샘플을 민간 유전자 분석 기업에 보내 일치하는 DNA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구글이 투자한 미국 유전자 분석 기업 ‘23andme’

몇 년 전만 해도 수백만원에 달했던 개인 유전자 분석 비용은 최근 들어 기술의 발전으로 몇 십만원 수준으로 낮아졌다. 암 등 각종 질환의 향후 발병 가능성을 미리 알아보기 위해 유전자 분석을 의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구글이 투자해 주목받았던 유전자 분석 기업 23andme는 약 120만건의 개인 유전자 정보 DB를 구축한 것으로 알려졌다.

◆ 민간 업체에 유전 정보 의뢰...엉뚱한 사람을 피의자로 몰아

앤시스트리닷컴과 23andme는 최근 2년 간 사법 기관으로부터 유전 정보 제출 요청을 5차례나 받았다. 앤시스트리닷컴은 아이다호 폭포에서 2014년 발생한 강간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데 필요한 유전 정보를 사법 기관에 제출했다. 23andme는 4차례에 걸쳐 이뤄진 사법 기관의 유전 정보 제출 요청에 응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앤시스트리닷컴이 사법 당국에 제출한 개인 유전자 정보로 엉뚱한 사람이 피해를 본 사실이 알려진 게 이번 논란의 발단이 됐다. 아이다호 폭포에서 발생한 강간살인 사건을 조사 중이던 미국 경찰은 범죄 현장에서 나온 DNA 샘플을 앤시스트리닷컴에 보내 일치하는 DNA 샘플이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앤시스트리닷컴은 이 샘플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유사한 DNA 데이터를 경찰에 보냈고 분석 결과를 확인한 경찰은 해당자의 신원을 확인해 달라는 영장을 앤시스트리닷컴에 제출했다.

그 결과 해당자는 경찰에 체포돼 6시간 동안 심문을 받았고 그의 DNA가 범죄 현장에서 나온 DNA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새로운 결과가 나올 때까지 약 한달간 용의자로 몰렸다.

DNA 염기서열을 컴퓨터로 분석하는 장면

에린 머피 미국 뉴욕대 법의학 교수는 “기술이 발전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사법 기관이 민간 기업에 유전 정보를 요청하는 일이 더 많아질 것이고 프라이버시 침해도 빈번해질 것”이라며 “전화 도청을 할 때 영장을 발부하는 것처럼 공공의 안전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바탕이 돼야 개인 유전자 정보를 범죄 수사에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다호 폭포 사건이 매체를 통해 알려져 논란이 되자 앤시스트리닷컴과 23andme는 향후 대응방안을 내놨다. 두 회사는 고객의 유전자 데이터를 제출하라는 사법 당국의 영장과 소환장을 모두 공개하는 ‘투명성 보고서’를 발간해 고객이 신뢰할 수 있는 개인 유전자 분석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한국도 유전자 분석 시장 개화 초읽기...프라이버시 보호 방안도 강구해야

국내에서는 아직 개인 유전자 분석 시장이 열리지 않고 있어 미국 사례와 같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적다. 의사나 병원의 처방 등 의료 기관을 거치지 않으면 유전자 분석을 할 수 없도록 한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 때문에 개인이 유전자 분석을 임의로 민간 업체에 의뢰하기 어렵다.

그러나 정부가 최근 경제 활성화를 위한 규제 개혁에 나서고 있어 유전자 분석 시장이 올해내 열릴 것으로 예상된다. 원칙적으로 금지한 유전자 분석을 의료기관을 거치지 않고 개인이 직접 할 수 있는 ‘DTC검사’를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박종화 UNIST 생명과학부 교수는 “현재 국내에서는 유전자 분석과 관련된 규제가 워낙 심해 민간 유전자 분석 기업이 개인 유전자 DB를 구축하지 못해 미국 사례와 같은 일이 발생하기는 어렵다”면서도 “향후 규제가 완화돼 개인 유전자 분석 서비스가 활성화되면 프라이버시 보호와 관련된 다양한 대책도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