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말이 필요 없습니다. 오늘 당장 뜯어고치세요."

이동걸(68·사진) 산업은행 회장은 이달 초 인사부장을 불러 임직원 경조사 관련 규정을 즉시 개정하라고 지시했다. 우스꽝스럽게도 그동안 산은 임직원들은 장인·장모상 등 처가 쪽 경조사는 사내 게시판을 통해 알릴 수 없었다. 직원들의 항의가 이어졌지만, 산은은 직계존비속의 경조사만 가능하다는 규정을 수십년간 손대지 않았다. 당시 이 회장은 출근 직후 내린 지시가 관련 부서에서 검토에 시간을 끌다 오후 5시에야 시행되는 것을 보고 화를 냈다. 그는 "이런 일은 회의가 필요 없다. 이런 식으로 일하면 나와 엇박자가 나는 것이다"라고 담당자들을 혼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에피소드는 지난달 12일 취임한 이 회장의 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으로 산은 임직원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신한금융그룹에서 은행, 증권 등을 돌며 잔뼈가 굵어 베테랑 금융인이라는 기대와 기업 구조조정과 관련된 경력이 전무한 '낙하산 인사'라는 우려를 동시에 받고 있는 그는 두 가지 난제를 풀어야 한다. 산업은행 개혁과 기업 구조조정 지도부의 역할이다. 이 회장이 국내 기업계 초유의 5조5000억원 손실을 기록한 대우조선해양 구조조정과 4월 총선 이후 본격화될 '좀비 기업' 퇴출 등 대대적인 기업 구조조정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금융권과 기업계가 주목하고 있다.

이 회장은 취임 직후 주변 사람들에게 "산은을 한마디로 하자면 비범한 사람들이 모인 평범한 조직이다. 구닥다리에 고리타분하다. 국책은행으로서 기업 구조조정 등 할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체질을 바꾸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산은 직원들의 변화를 요구하는 중이다. 그는 지난달 12일 취임식이 열린 산은 지하 1층 강당에 본인의 이메일 주소를 현수막으로 붙여서 공개했다. "직원들이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떤 내용이든 받겠다. 현장의 건의와 아이디어로 산은을 바꿔나가겠다"고 말했다.

산은의 상황은 심각하다. 대우조선해양 등 대규모 부실로 산은은 지난해 1조9000억원대의 적자를 기록할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2013년 1조4000억원대의 적자로, 외환 위기 당시인 2000년(1조3000억원대 적자) 이후 13년 만에 적자의 수렁에 빠진 뒤 좀처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 회장은 우선 비(非)금융 자회사들을 조기 매각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금융위의 결정으로 산은이 15% 이상을 출자한 비금융 자회사 116개(출자전환 14개, 중소·벤처투자 102개)를 올해부터 3년간 매각하기로 예정돼 있다. 이 회장은 이에 대해 "116개이니 매년 서른 몇 개씩 팔면 된다는 식으로 계산하고 일하지 마라. 속도를 내서 올해 50개 이상도 매각할 수 있으면 매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고 지시한 상태다. 그는 현 정부 임기 내에 한국항공우주산업(KAI), 대우조선해양, 한국GM 등을 포함해 116개를 모두 매각하는 방안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회장의 발등의 불은 대우조선해양, 현대그룹 등의 구조조정이다. 대우조선해양의 경우 5조5000억원대의 부실을 안고 회사를 정상화시켜야 한다. 산은과 수출입은행이 총 5조2000억원을 지원키로 했지만, 인원 조정 등 산적한 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는 최근 사석에서 “대우조선해양은 영하 163도로 운반해야 하는 LNG선과 관련된 특허도 갖고 있고, 3000t 이상 잠수함 등 특수 분야에서 매우 우수한 회사라 가능하다면 살리는 방향에서 일이 진행돼야 한다”는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는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산업은행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향후 강도 높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노조와의 협상 등에서 밀리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그는 “대우조선해양이든 현대상선이든 목숨 걸고 회사를 살리려고 해야 돕는다”면서 “기다려 줄 수 있는 데까지 기다려 주겠지만, 나는 디데이(D-Day·작전 개시일)를 놓치는 사람은 아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