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권오현 이사회 의장이 11일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에서 열린 주주총회에서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안건에 반대합니다. 표결에 부칩시다."

11일 오전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 회사 측이 정기 주주총회(이하 주총)에서 사외이사 선임 안건(案件)을 처리하려고 하자 한 소액주주가 손을 번쩍 들고 반대를 외쳤다. 통상 대기업의 주총은 회사가 미리 준비해둔 절차대로 박수를 쳐서 안건을 통과시키는 경우가 많다. 주총 시간도 대부분 한 시간 이내에 일사천리로 끝난다. 반대 의견은 회사 측을 지지하는 주주들의 목소리에 묻혀버리기 일쑤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소액주주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회사 측이 이를 무시하지 않고 의견을 받아들이는 모습도 나타났다. 이날은 삼성전자·삼성물산·현대자동차 등 54개 상장사의 정기 주총이 동시에 열렸다. 기업들은 주주 가치 제고와 지배구조 개선 등을 약속하며 이사 선임, 배당액 확정 등의 안건을 원안(原案)대로 통과시켰다.

11년 만에 표결 벌어진 삼성전자 주총

삼성전자 주총에서는 2005년 이후 11년 만에 현장 표결이 진행됐다. 주총 진행을 맡은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이사회 의장)은 단 한 주(株)를 가진 소액주주가 손을 들어도 계속 발언권을 줬다. 주주가 반대 의견을 고수하면 번번이 표결에 부쳤다.

오전 9시에 시작된 주총은 3시간을 넘겨 낮 12시 20분쯤에야 끝이 났다. 이날 주총에선 소액주주들의 요청으로 총 네 번의 표결이 이뤄졌다. 송광수 전 검찰총장과 박재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을 각각 사외이사로 선임하는 것, 신종균 사장을 사내이사로 선임하는 것, 이사들의 보수(報酬) 한도를 승인하는 것에 관한 안건이었다. 하지만 네 번의 표결은 모두 회사가 올린 안건이 96~99%의 찬성률로 통과됐다.

작년 9월 제일모직, 에버랜드 등을 합병한 이후 첫 정기 주총을 연 삼성물산에서도 이례적인 표결이 벌어졌다. 작년 재무제표를 승인하는 안건이 상정되자, 주식 255주를 가졌다는 한 주주가 "합병 6개월도 안 돼 어떻게 2조6000억원의 손실을 볼 수 있느냐"면서 "경영진이 물러나겠다고 이 자리에서 약속하지 않으면 의안을 표결에 부칠 것을 요청한다"고 말했다. 결국 표결이 진행됐고 96%가 넘는 찬성으로 안건은 통과됐다. 삼성물산 관계자는 "합병 전에는 세 회사 주총에서 표 대결이 한 번도 없었다"고 전했다.

소액주주의 '표결 요청'은 사실상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고, 회사 측 안건이 부결되는 경우도 매우 드물다. 재계 한 관계자는 "소수의 반대 의견이 있어도 '원안대로 제청하자'며 다같이 박수 치고 의장이 의사봉을 '땅땅땅' 치면서 밀어붙이는 것이 보통인데 올해 주총 분위기는 좀 더 유연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54개사 동시 주총에 '주주 권리 훼손' 비판도

삼성그룹 주요 계열사는 이날 주총에서 대표이사만 맡던 이사회 의장직에 사외이사도 선임할 수 있도록 정관을 개정했다. 삼성전기는 사외이사인 한민구 서울대 공대 명예교수를 이사회 의장에 선임했다. 삼성 계열사 중 사외이사가 이사회 의장직을 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호텔신라 주총에서는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이부진 사장이 올해로 5년째 주총을 진행했다.

포스코는 주총에서 '기술 판매 및 엔지니어링 사업'을 사업 목적에 추가했다. 실적 부진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첨단 철강 생산 공법인 '파이넥스(FINEX)' 기술 등을 다른 회사에 판매해 수익을 올리기 위해서다. 현대자동차는 사내이사로 정의선 부회장을 재선임하고 이원희 사장을 신규 선임했다. 정 부회장은 2010년, 2013년에 이어 세 번째로 사내이사를 맡게 됐다.

이날 54개 상장사가 일제히 주총을 연 것에 대해 일각에서는 "대기업들이 여전히 한날한시에 주총을 열어 주주들의 권리를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왔다. 여러 회사 주식을 갖고 있어도 주총은 한 군데밖에 갈 수 없어 의견 제시가 어렵기 때문이다. 오는 18일에는 LG그룹 계열사와 아모레퍼시픽, 농심, 대한항공 등 361곳이 주총을 연다. 또 25일에는 912개 회사의 주총이 예정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