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설립해 올 8월 창업 120주년을 맞는 국내 최장수 대기업인 두산그룹의 회장 승계자로 박정원(54) ㈜두산 회장이 확정됐다. 이에 따라 국내 재계에서 첫 '4세 오너 경영자 시대'가 개막하게 됐다. 삼성그룹과 현대차 그룹은 3세 경영 체제 승계를 준비하는 상태다. 한국 재계에서 보기 드문 '형제간(間) 승계 문화'를 이어온 두산그룹에서 4세 승계는 예정된 수순(手順)이다. 한때 '구조조정 모범 기업'으로 불려오다 실적 부진을 겪고 있는 두산그룹이 '박정원 리더십'으로 위기를 돌파하고 또다시 도약할지 주목된다.

구조조정 등 과제 산적… 위기 돌파 성공할까

두산그룹은 1980년대부터 창업 3세 형제가 교대로 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박용곤(장남), 고 박용오(차남), 박용성(3남), 박용현(4남), 박용만(5남) 회장이 나이 순서대로 총수를 맡은 것이다. 이생그룹을 별도로 세워 일찌감치 분가(分家)한 6남 박용욱 회장만 예외였다.

2005년 7월 '형제의 난'이란 3세 경영권 분쟁이 벌어졌지만 두산가(家)의 이런 승계 원칙은 유지될 전망이다. 오너 4세 중 맏형인 박정원 회장이 회장직을 승계해 '세대순·장자(長子)순'이라는 원칙이 지켜졌기 때문이다.

두산그룹 차기 회장으로 결정된 박정원(왼쪽) ㈜두산 지주 부문 회장이 지난 1월 20일 두산건설이 투자한 신분당선 연장 구간의 시승 행사에 참석한 뒤 전자(電子) 방명록에 서명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두산가는 가족들이 모여 차기 회장에 대한 논의를 통해 의견을 모은다"며 "박용만 회장의 경우 2012년 가족모임에서 직전 회장인 박용현 회장처럼 3년 임기로 정해졌는데, 박정원 회장으로 넘겨줘야 할 지난해 그룹 유동성(流動性·현금 흐름)이 워낙 어렵고 박용성 전 회장에 대한 검찰 수사 건까지 맞물려 승계를 미룬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박용만 회장은 그룹 회장직과 ㈜두산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나지만 위기가 가장 심각한 두산인프라코어의 회장은 그대로 맡아 결자해지 차원에서 구조조정을 끝까지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는 대한상의 회장은 물론 그룹 연수원과 경제연구소를 총괄하는 두산리더십기구(DLI)의 회장직도 수행할 예정이다. 박용만 회장은 "이제 그룹 회장직을 내려놓을 때가 왔다"며 "지난해까지 글로벌 경기 침체 속에서 그룹이 턴어라운드(turn-around·흑자로 실적 개선)할 준비를 마쳤고 대부분 업무도 (박정원 회장에게) 위임하는 등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승부사' 박정원, 두산 DNA 다시 바꿀까

재계 일각에서는 박 회장의 용퇴(勇退)가 두산인프라코어와 두산중공업 등 주요 계열사의 유동성 위기 등과 무관찮다는 관측도 나온다. 최근 수년간 주력 계열사들의 실적 부진이 계속되면서 두산그룹은 안팎에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요구받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룹 내 첫 4세 회장인 박정원 회장 입장에서는 위기 탈출 능력을 보여줘야 할 부담을 안고 있다. 구체적으로 재무 건전성이 악화된 주요 계열사를 다시 정상 궤도에 빨리 올려놓고 올 상반기 본격화될 서울 시내 면세점 사업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키는 게 큰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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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관계자들은 박정원 회장에게 결정적인 ‘승부사 기질’이 있다고 지적한다. 1999년 ㈜두산 부사장 시절 상사 부문을 맡아 사업 포트폴리오를 수익 사업 위주로 과감히 정리해 취임 이듬해인 2000년에 매출액을 30% 넘게 끌어올린 게 대표적이다.

특히 두산그룹이 지난해 시내 면세점 사업에 발을 들여 중공업 중심에서 소비재로 그룹의 무게중심을 다시 옮길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된 만큼, ‘박정원 체제’의 향후 변신이 주목된다.

재계 관계자는 “박정원 회장이 어떤 사업을 잘라내고 어떤 사업은 확실하게 키울지를 결단해야 한다”며 “그룹의 DNA를 성공적으로 바꾸느냐에 따라 두산 4세 간 사촌 경영의 지속 여부가 판가름날 것”이라고 말했다.

두산그룹은 현재 최근 계열사별로 구조조정을 통해 재무 건전성 제고에 사활(死活)을 걸고 있다.특히 두산인프라코어는 미국 소형 건설장비 자회사인 밥캣의 국내 증시 상장(上場)이 ‘발등의 불’로 떨어진 상태다. 그나마 두산인프라코어가 2일 공작기계 사업부를 사모펀드인 MBK파트너스에 1조1300억원에 매각하기로 합의해 ‘급한 불은 일단 껐다’는 평가가 나온다.

박정원 회장은 이날 본지와 통화에서 “그룹 분위기가 많이 좋지 않아 부담되는 게 사실이지만 즐거운 분위기로 이끌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며 “사명감을 갖고 회장직을 수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차기 총수 박정원 회장은]

1985년 입사해 현장 두루 거쳐… 주요 인수합병에 깊숙이 관여

1985년 두산산업(현 두산 글로넷BU)에 신입 사원으로 입사한 박정원 차기 회장은 2007년 ㈜두산 부회장, 2012년 ㈜두산 지주 부문 회장을 맡아 그룹 신성장 동력 발굴에 관여했다.

2014년 연료전지 사업을 신성장 분야로 정하고 국내의 퓨얼셀파워와 미국 기업인 클리어에지파워 인수를 주도했다. 그는 지난해 ㈜두산의 서울 시내 면세점 사업 진출 결정에도 역할을 했다. 두 사업은 두산그룹의 미래 먹거리로 꼽힌다. '야구 광(狂)'으로 프로야구 두산 베어스 구단주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