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다니는 회사원 최모(42)씨는 최근 겨울휴가를 받아 직장 동료 2명과 사이판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6박7일 동안 숙식 제공에 하루 두 번 골프를 칠 수 있는 리조트 비용이 1인당 80만원. 저가 항공을 이용한 왕복항공료(40만원)까지 합쳐 1인당 총 120만원이 들었다. 최씨는 "제주도에서 일주일간 골프 치며 휴가를 보내려면 비용이 사이판보다 훨씬 더 든다"면서 "작년 겨울휴가 때 처음 사이판 골프투어를 해봤는데 비용이 합리적인 데다 날씨도 따뜻해 올해 또 가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국내 거주자가 해외에서 사용한 카드(신용·체크·직불카드) 금액이 전년 대비 8.7% 늘어난 15조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앞서 설 연휴 기간인 지난 5~9일 인천국제공항 하루 평균 이용객은 16만명으로 2001년 개항 이후 최고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인천공항에 가보면 "한국 경제가 정말 불황 맞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해외여행객으로 북적이는데, 지난해 국내 민간소비(명목) 증가율은 4%대 중반에 그칠 정도로 소비자들이 한국에서는 지갑을 닫고 해외 나가 돈을 쓰고 있다. 갈수록 국내·해외 소비의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뛰는 해외 소비, 기는 국내 소비

한국은행이 23일 발표한 '2015년 거주자의 카드 해외 사용 실적'을 보면 지난해 국내 거주자가 해외에서 카드로 사용한 금액은 132억6400만달러로 2014년(122억100만달러)보다 8.7% 늘어났다. 지난해 평균 환율(달러당 1131.5원)로 환산하면 GDP(국내총생산)의 1%가량인 15조원가량을 해외에서 쓴 셈이다. 한국은행 자본이동분석팀 정선영 과장은 "해외 카드 사용액이 늘어난 이유는 저가 항공사의 운항노선이 확대되고 엔저 현상이 이어지면서 해외여행객이 급증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내국인 출국자는 1931만명으로 2014년(1608만명)보다 무려 20.1% 늘어났다.

그 결과 국내 민간소비(명목)는 연 2~4%대의 낮은 증가율을 보이는데, 해외 카드 사용액은 매년 10~15% 가량 늘고 있다. 우리 국민의 해외여행은 줄기차게 늘고 있는 반면, 지난해 메르스 여파로 국내에 오는 외국 관광객이 일시 급감한 데다 중국 관광객들이 대거 일본으로 발길을 돌리는 바람에 지난해 여행 수지 적자는 96억7000만달러로, 2007년(158억4050만달러 적자) 이후 8년 만에 최대 폭을 기록했다.

실속파 20·30대가 해외 소비 주도

불황에도 카드 해외 사용액이 계속 늘어나는 이유는 20·30대 젊은 층의 소비 패턴이 달라졌기 때문으로 카드 업계는 분석한다. 삼성카드가 자체 이용 실적을 분석한 결과, 지난해 20·30대 해외여행자 수는 2010년에 비해 66% 증가했다. 40·50대(52%)나 60대 이상(44%)보다 훨씬 더 큰 폭으로 늘어난 것이다.

해외여행 상품 중에선 고령층이 선호하는 패키지 상품보다 젊은 층이 즐기는 자유 여행이 늘어나는 추세다. 삼성카드에 따르면, 전체 여행 결제금액(국내 여행 포함) 가운데 패키지 해외여행 상품의 비중은 2014년 17%에서 지난해 12%로 줄었다. 반면 해외 자유여행의 비중은 같은 기간 10%에서 16%로 늘었다. 삼성카드 BDA(Biz Data Analytics)센터 허재영 상무는 "젊은 층은 편하지만 비싼 패키지 여행보다 직접 호텔이나 항공을 예약하고 개성에 따라 원하는 일정을 짜는 자유 여행을 선호한다"고 말했다.

젊은 해외 여행객의 증가는 카드 1장당 사용액으로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카드 해외 사용액은 늘었지만, 카드 1장당 해외 사용액은 345달러로, 1년 전보다 15.1% 줄었다.

서비스산업의 국내 경쟁력 키워야

해외여행과 해외 소비가 늘어나는 것은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다만 전문가들은 "서비스산업의 국내 경쟁력을 키운다면 구매력 있는 계층의 해외 소비 중 상당 부분을 국내 소비로 끌어들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 교육·쇼핑에서 정책적 노력이 효과를 본 분야도 있다. 교육 부문에선 2000년대 중반에 외국어로 가르치는 국제학교가 많이 설립되면서 유학·연수 수지는 2010년 44억5060만달러 적자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지만, 2011년부터 5년 연속 적자 폭이 줄었다. 정부가 지난해 내수 진작과 소비 활성화를 위해 판매가격을 대폭 낮춘 '코리아 블랙프라이데이'도 효과가 있었다.

현대경제연구원 최성근 연구위원은 "해외여행을 통해 눈높이가 높아진 젊은 세대를 국내 소비로 끌어들이기 위해선 외국보다 터무니없이 비싼 제품과 서비스 가격을 낮추고, 젊은 층을 겨냥한 매력 있는 관광 상품을 국가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