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이 다시 꿈틀대고 있다. 오랜 세월 세계사의 주축이었던 구대륙 유럽과 아시아를 관통하는 거대한 땅 유라시아가 잠에서 깨고 있다. 중국은 일찌감치 ‘일대일로(一帶一路)’ 구상으로 이 지역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다. 우리 정부도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시작했다. 기업들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진출을 시작했거나 준비를 서두른다. 하지만 지역에 대한 역사문화적 이해가 없이는 자칫 역풍을 부를 수 있다. 이런 ‘인식의 공백 혹은 부족’을 메우기 위해 조선비즈는 국내 대표 연구 집단인 중앙아시아학회와 새로운 연재물을 기획했다. 실크로드의 시작부터 최근까지 길을 열고 넓혀온 주역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 광활한 뉴 프론티어를 재조명한다. 격주로 모두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주]

며칠전 뉴스에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되는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거치는 실크로드 고속화물열차가 중국을 출발하여 이란에 성공적으로 도착했다는 기사가 발표되었다. 이 기차는 중국 남부에서 출발하여 신강성(新疆省, Xinjiang Province) 위구르(Uigur, 维吾尔)자치구의 주도 우루무치를 지나 북쪽의 천산산맥을 넘어 카자흐스탄, 키르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을 거쳐 이란의 테헤란까지 장장 9500여킬로미터를 14일만에 주파하였다. ‘철의 실크로드’라고 불리우는 이 기찻길은 앞으로 이란을 관통하여 유럽까지 이어질 계획이다.

중국과 유럽을 연결하는 신실크로드의 구상은 중국 실크로드의 기점이라고 알려져 왔던 고대 중국의 수도이자 중국 서북지방의 주요 도시인 서안(西安, Xian)에서 자란 현 중국 주석 시진핑이 주도하여 진행하는 것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경제 교류가 가장 큰 목적이다. 실크로드 연구자로서 다소 아쉬운 점은, 철의 실크로드로 불리는 새로운 중국발 기차 노선은 고대 캐러반들의 이동 경로나 전통적으로 실크로드라고 불려왔던 경로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사실 실크로드라는 동서교섭로는 단선(單線), 즉 하나의 길이 아니라 여러 개의 갈래길로 이어진 복잡한 길로서, 중앙아시아 내륙을 관통하는 경로도 몇 가지가 있다. 실크로드의 생명력은 바로 이러한 다양성과 복잡성의 네트워크에 있다. 실제로 기원전후부터 기원후 10세기 경까지 고대의 캐러반들이 지나다녔던 실크로드는 현대 중국이 추진하고 있는 신실크로드 철도 경로와는 달리, 서안에서 감숙성을 지나서 서쪽으로 향하다가 만나는 거대한 타클라마칸 사막을 횡단하는 사막길이다. 죽음의 사막이라고 불리는 타클라마칸 사막 일대의 타림(Tarim)분지를 여행하는 길은 사막 북쪽의 거대한 천산산맥과 남쪽의 곤륜산맥 사이를 지나는 오아시스를 연결하며 이어진다. 시진핑의 일대일로 정책에서는 이 옛 길보다는 우루무치에서 북쪽으로 천산산맥을 넘어 멀리 돌아가는 길을 개발하고 있으며, 이것은 타림분지 일대의 정치적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오렐 스타인. 1909년 촬영.

실크로드의 옛 사막길은 16세기 초반 마젤란의 세계 일주 항해의 성공 이후 급속하게 쇠퇴하여 한동안 세계 역사상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타림분지 인근의 오아시스를 따라서 발전한 고대 실크로드의 문명들은 사막의 모래 바람 속에 묻혀진 채, 19세기 후반까지 역사속의 미스테리로만 전해져왔다. 이 일대의 오래된 문명에 대해서는 옛 문헌에 일부 기록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 잊혀진 문명의 흔적들을 처음으로 발굴하여 세계 학계에 소개하여 주목받도록 한 사람은 헝가리 출신의 영국인 오렐 스타인(Marc Aurel Stein, 1862-1943)이다.

19세기 후반 남하정책을 펴던 러시아와 인도 이북으로 진출하던 영국은 비슷한 시기에 타림분지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당시 타림분지 일대는 1755년 청나라가 몽골을 점령한 이후 청나라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있는 상태였다. 아시아 내륙의 가장 오지였던 이 지역에 진출한 근대초기의 헝가리, 스웨덴, 영국, 러시아, 독일, 일본 등 여러 나라의 탐험대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피터 홉커크의 ‘실크로드의 악마들’에서 상당히 자세하고 흥미롭게 기술되어 있다.

이들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중요한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오렐 스타인이다. 스타인에 대한 평가는 중국과 서구 사회에서의 평가가 완전히 상반된다. 중국에서는 가장 지독한 보물 도굴꾼, 혹은 희대의 도둑으로 비난하는 반면, 서구 학계에서는 중앙아시아 고대 실크로드 문명 및 돈황학 연구의 선구자로 존경하기 때문이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대인 가정에서 막내로 태어난 스타인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죽음의 사막이라는 타클라마칸 사막 일대를 횡단하는 중앙아시아 내륙 탐사를 4차에 걸쳐 진행했다. 그의 탐사대에는 언제나 서양인 동행이 한 명도 없이 현지 고용인들로만 팀이 꾸려졌다. 대신 그는 매번 탐사에 ‘대쉬(Dash)’라는 이름의 강아지를 한 마리 데리고 다녔는데, 그의 평생 모두 모두 7마리가 동행했다고 한다.

스타인의 타림분지 및 사막 횡단 탐사는 한겨울에 무리하게 진행되기도 하고, 물이 없어서 고생하다가 죽을 뻔하기도 했으나, 지리적 실측 및 고고학적 발굴은 비교적 최신 기술을 적용하여 이루어진 편이다. 그는 2차 탐사 도중에 심각한 동상에 걸려 발가락 2개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는 아무리 힘든 여행길에서도 내내 일지를 작성하여 기록을 남겼고, 직접 유적 측량을 진행하였으며, 중요한 곳에서 사진을 촬영해 놓았다. 또한 틈틈이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서 근황을 적어 보냈으며, 학계의 여러 동료들과도 꾸준히 정보를 교환하였다. 그는 타림분지 인근에서 진행한 4차의 탐사 결과를 ‘고대 호탄(Ancient Khotan)’ ‘세린디아(Serindia)’, ‘이너모스트 아시아(Innermost Asia)’ 등과 같은 보고서로 발간하였으며, 그가 수집한 수많은 유물과 기록한 자료들 현재 영국박물관, 영국도서관, 뉴델리국립박물관 등 여러 박물관에 지금까지도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스타인의 제 3차 중앙아시아 탐사대. 투르판의 한 유적 앞에서 탐사대 일행과 찍은 사진이다. 중앙에 스타인이 대쉬 3세를 데리고 앉아 있다. 대쉬 3세는 제 3차 탐사에 동행했던 개로서, 1912년부터 스타인의 여행에 동행하였다.

중앙아시아 미술사와 고고학적 측면에서 보면 스타인은 가장 중요한 학자 중의 하나라고 평가된다. 그는 미란(Miran), 루란(Loulan), 단단윌릭(Dandan Uriq) 등과 같은 타림분지 남쪽 사막에 숨겨진 여러 곳의 고대 유적들을 직접 발굴했을 뿐만 아니라, 감숙성 최북단의 돈황(敦煌, Dunhuang) 석굴에 숨겨져 있던 장경동(藏經洞)의 수많은 고대 문서와 유물들을 처음으로 수집해서 서구에 공개했다. 돈황 장경동 유물 수집 문제는 스타인에 대한 상반된 평가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사건이다. 유물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중국측에서는 지속적인 비난을, 반대로 유물을 암흑 속에서 구출해왔다고 생각하는 서구 학계에서는 선구적이고 모범적인 학자로서 존경을 보내는 경향이 강하다.

스타인은 어렸을 때에 부다페스트와 드레스덴에서 교육을 받았고, 이후 비엔나 대학과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산스크리트와 페르시아어를 공부했다. 1883년 그는 튀빙겐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884년에는 영국으로 건너가서 본격적으로 동양학 연구를 시작했다. 1887년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로 건너가서 펀잡 대학(University of Punjab)에 직장을 잡았으며, 1888년부터 1899년에는 라호르(Lahore, 현재는 파키스탄에 속함)의 동양학부(Oriental College)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 그는 1898년에 발간된 스벤 헤딘(Sven Hedin, 1865-1952)의 저서를 읽고 자극을 받아 중앙아시아의 오지 탐사를 결심하고 실천에 옮겼다.

스타인의 중앙아시아 타림분지 및 고대 실크로드 유적에 대한 제 1차 탐사는 인도 식민지 정부의 후원을 받아서 1900년 5월부터 1년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는 1차 탐사에서 타림분지 남쪽의 호탄 인근 유적지들을 사막 속에서 찾아내어 발굴조사했는데, 이때 유명한 라와크(Rawak)의 불교 유적 및 니야(Niya), 엔데레(Endere), 단단윌릭(Dandan-Uiliq), 요트칸(Yotkan)의 유적들을 처음으로 조사하였다. 이때 초기 간다라 불교조각 양식과 유사한 불상들 및 수많은 벽화와 그림, 조각들이 발굴되었는데, 그 중에는 비단의 전래와 관련된 유명한 공주의 이야기나 힌두교 신상과 이란풍의 “비단의 신”을 그린 목판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돈황 제 16굴과 17굴 전경. 1907년 스타인 촬영. 앞쪽의 작은 문이 장경동석굴인 17굴의 입구이며, 앞에 늘어 놓은 두루마리들이 스타인이 조사하기 위해서 꺼내 놓은 고사본들이다. 멀리 뒤쪽으로 16굴의 본존과 협시 불상들이 보인다.

스타인은 이 미술품들의 양식이 중국풍이 아니라 서아시아나 인도 미술의 영향을 따르고 있음에 주목하여, 타림분지 남쪽 오아시스의 고대 문명이 중국보다는 서쪽의 인도 및 페르시아 문화와 친연성이 있음을 처음으로 확인하였다. 이것은 당시 중국 지배하에 있던 타림분지 일대의 역사, 문화적 성격이 중국적 전통 아래에서 발전한 것이 아님을 알려주는 것으로서, 당시 서구 학계에는 상당히 충격적인 연구 성과였다.

스타인의 1차 탐사 보고를 통해서 고대 실크로드의 잊혀진 옛 문명들이 타클라마칸 사막 인근 지역에 다수 묻혀있다는 것을 알게 된 유럽의 동양학자들은 이때부터 경쟁적으로 타림분지의 타클라마칸 사막 인근 일대를 탐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외국 탐사대의 진입과 함께 고대 실크로드의 잊혀진 문명과 문화재들의 발굴과 파괴는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1904년 영국 시민권을 획득한 스타인은 1906년 4월부터 1908년 10월까지 인도 정부와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의 지원으로 중앙아시아 타림분지 일대의 제 2차 탐사를 진행하였다. 이때 그는 유명한 돈황 장경동 문서와 유물들을 수집하여 유명해졌다. 돈황 시내에서 좀 떨어진 명사산(鳴沙山)은 모래로 이루어진 산으로, 지금은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 버렸지만, 이전에는 매우 황량한 모래 사막의 시작점일 뿐이었다. 명사산 한쪽에 자리잡고 있는 천불동(千佛洞, 현재의 돈황 막고굴) 석굴은 중앙아시아 석굴 사원 중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중요한 불교유적지이다. 스타인은 2차 답사에서 호탄과 롭노르(Lop nor) 호수 일대의 미란과 루란 유적를 탐사했으며, 더 서쪽으로 가서 돈황 천불동까지 탐사를 진행했다.

‘비단의 신’ 채색 목판 뒷면. 6세기경. 1901~1902년 단단윌릭 유적 출토. 영국박물관 스타인 수집품 소장.

헝가리 출신이었던 스타인이 돈황을 최종 목적지로 정하게 된 것은 서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돈황을 방문했던 서양학자들이 헝가리 지질학 탐험대였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어 흥미롭다. 당시 헝가리 학자들은 고대 헝가리인의 기원이 중앙아시아의 훈(Hun)족에 있다고 생각하여 중앙아시아 지역 탐사를 진행했는데, 1877년부터 1880년까지 진행된 헝가리 탐험대에 의해서 1879년 돈황의 천불동 석굴이 최초로 서양에 보고되었다. 이 탐험대의 일원이며 당시 헝가리 지리학회 회장이었던 로치 라요스(Lóczy Lajos, 1849–1920)는 스타인과 꾸준히 편지로 연락하면서, 스타인에게 돈황 천불동의 아름다운 경관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그의 영향으로 스타인은 이후 내내 돈황을 방문하는 것을 꿈꾸었으며, 2차 탐사에서 그 꿈을 실현하면서 세계 문명사에 잊을 수 없는 족적을 남기게 된 것이다. 스타인의 돈황 탐사는 고대 실크로드 문명 연구에 있어서나, 스타인의 탐사 여정에서나 가장 획기적인 사건 중의 하나였다.

스타인은 돈황 답사 직전에 방문한 사막속의 황폐한 미란의 불교 사원지에서 날개달린 아름다운 천사상과 붓다의 일대기를 그린 벽화를 발굴했으며, 루란의 고대 도시 유적지에서는 한자와 카로슈티어로 씌여진 목간과 서책을 다수 발굴하였다. 스타인은 미란 출토 벽화들을 포함한 발굴품들을 모두 카슈가르로 보내어 영국으로 보내고자 했는데, 아쉽게도 일부 유물들은 영국으로 전달되지 못하고 행방불명 되었다. 최근 그중 일부 유물이 인도 뉴델리 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음이 확인되기도 했다.

1907년 3월 돈황에 도착한 스타인은 돈황 인근에서 만리장성의 서쪽 끝 부분을 확인하여 발굴했으며, 돈황 천불동에서 방대한 양의 고문서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조사를 하게 되었다. 당시 천불동을 관리하고 있던 인물은 왕원록(王圓籙)이라는 도사였다. 그는 1900년 6월 천불동 석굴을 정비하다가 우연히 제 16굴 복도의 벽 안쪽에서 수만점에 달하는 고문헌과 유물로 꽉 차 있는 비밀의 방 하나를 발견하여 중국 정부에 신고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돈황 장경동 석굴이다(현재 17굴). 당시 정부 관리들은 이 유물들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이나 지원없이 그대로 왕도사에게 보관을 맡겼다.

돈황 석굴을 보수 및 관리하는 데에 돈이 필요했던 왕도사는 스타인과 협상하여 조사를 허가하고 그에게 장경동 유물 중 일부를 팔았다. 스타인은 장경동 유물 중에서 중국어, 산스크리트어, 소그드어, 티베트어, 위구르어를 비롯한 여러 문자로 씌여진 고사본들 및 질이 좋은 비단과 종이에 그려진 다양하고 아름다운 불교 회화들을 조사했다. 스타인의 장경동 조사는 바로 현대 돈황학의 시작이 되었다. 아쉽게도 스타인은 중국어를 읽지 못해서 중국어 문헌을 충분히 검토하지 못했지만, 비단이나 종이에 그려진 아름다운 그림들이나 그가 읽을 수 있는 다양한 언어로 기록된 여러 가지 필사본 및 목판본 등을 조사해서 그중 수천 권을 구입해서 영국으로 가져왔다. 이 유물들은 스타인의 제 2차 탐사를 지원했던 영국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스타인이 발견하여 유럽으로 가져간 돈황 장경동의 문서들은 잊혀진 중국 및 중앙아시아의 역사, 문화, 종교, 예술의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들이다. 스타인은 제 2차 탐사의 성성공으로 인하여 대중적인 명성과 국제적인 학자로서의 명예를 인정받았으며, 1913년에는 영국 국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는 1913년 7월부터 1916년 2월까지 타림분지 남쪽과 돈황, 투르판 일대 지역의 제 3차 탐사를 진행한 후 탐사보고서를 발간했는데, 이 보고서들은 지금까지도 규모면에서도 내용면에서도 매우 훌륭한 학술적 연구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스타인은 1930년에 또다시 제 4차 중앙아시아 탐사를 시도했지만, 이때에는 중국 정부의 정책 변화로 인하여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귀환하였다. 이후 그는 인도 서북지역 및 이란 지역 탐사를 꾸준히 진행했으며, 1943년 10월 80세의 노령으로 아프가니스탄 답사를 진행하기 위해 수도 카불로 갔다가 현지에서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서 그 곳에 묻혔다.

1907년 스타인이 돈황 장경동을 방문한 이후, 프랑스의 펠리오 및 일본의 오오타니 등도 돈황 장경동 유물을 구입하여 해외로 반출하였다. 중국 정부에서는 유물 유출이 여러 번 이루어지고도 한참 후에야 왕도사를 처벌하고 남은 장경동 문서들을 북경의 도서관으로 옮겼다. 중국에서는 장경동 유물들을 대량 반출해나간 스타인, 펠리오, 오오타니 등을 문화재 도굴꾼이자 제국주의의 스파이 등으로 비난하지만, 스타인의 탐사 당시에 중국 정부에서는 타림분지 일대의 잊혀진 실크로드의 고대 문명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스타인이 아니었더라면 지금 장경동의 문서와 유물들이 우리에게 남아 있었을 가능성은 상당히 희박하다.

‘석가불삼존도’. 비단에 자수. 중국 당나라 8세기경. 돈황 장경동 출토. 영국박물관 소장. 스타인 수집품(왼쪽). 1914년 영국박물관 스타인 컬렉션 전시 상태. 석가불삼존도가 중앙에 걸려 있다.

서양인들의 문화적 침략으로 인식되기도 하는 19-20세기초반의 서양 탐험가들의 발굴과 연구는 사실 보물찾기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스타인만큼 뛰어난 열정과 탐구심으로 인내롭게 자료를 수집 및 정리, 연구한 학자는 많지 않다. 중국 측에서는 지금도 스타인의 유물들을 영국에서, 혹은 각각의 소장처에서 다시 중국으로 반환해야한다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필자는 이 견해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우리가 새롭게 주목해야 할 것은 스타인이 수집한 '스타인 컬렉션(Stein Collection)'의 상당수를 소장하고 있는 영국 학계의 활동이다. 1994년 영국도서관의 수잔 위트필드(Susan Whitfield)는 국제돈황프로젝트(International Dunhuang Project, IDP)를 발족하여 영국, 중국, 러시아, 인도, 독일, 미국, 프랑스, 헝가리, 일본, 한국 등에 분산되어 있는 돈황 관련 문헌과 문화재들을 온라인 상에서 연결하고자 하는 시도를 진행하고 있다(http://idp.bl.uk/ 참조). 이 프로젝트는 돈황 관련 문화재를 소장한 각각의 기관들이 자신들의 소장품들을 디지털 데이터베이스화하여 서로 공유할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2016년 2월 현재 영국, 중국, 러시아, 일본, 독일, 프랑스 등 6개국이 참여하여 총 482,617점을 전산화 자료로 공유 및 공개하고 있다. 영국박물관과 도서관에서는 지금도 꾸준히 오렐 스타인에 대한 연구와 학술대회를 꾸준히 진행하면서, 그에 의해서 시작된 돈황학과 고대 실크로드 문명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영국이 중심이 되기는 하지만 다국적 네트워크로 연결된 스타인의 학문적 후예들은 인터넷이라는 가상현실 속에서 자유롭고 개방된 신실크로드를 구축해가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가 수집한 유물들이 그동안 중국에 있었다면, 고대 실크로드 문명에 대한 우리들의 정보는 지금보다 훨씬 빈약한 양에 불과하거나 아예 전혀 없었을 수도 있다.

공으로 인하여 대중적인 명성과 국제적인 학자로서의 명예를 인정받았으며, 1913년에는 영국 국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는 1913년 7월부터 1916년 2월까지 타림분지 남쪽과 돈황, 투르판 일대 지역의 제 3차 탐사를 진행한 후 탐사보고서를 발간했는데, 이 보고서들은 지금까지도 규모면에서도, 내용면에서도 매우 훌륭한 학술적 연구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스타인은 1930년에 또다시 제 4차 중앙아시아 탐사를 시도했지만, 이때에는 중국 정부의 정책 변화로 인하여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귀환하였다. 이후 그는 인도 서북지역 및 이란 지역 탐사를 꾸준히 진행했으며, 1943년 10월 80세의 노령으로 아프가니스탄 답사를 진행하기 위해 수도 카불로 갔다가 현지에서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서 그 곳에 묻혔다.

1907년 스타인이 돈황 장경동을 방문한 이후, 프랑스의 펠리오 및 일본의 오오타니 등도 돈황 장경동 유물을 구입하여 해외로 반출하였다. 중국 정부에서는 유물 유출이 여러 번 이루어지고도 한참 후에야 왕도사를 처벌하고 남은 장경동 문서들을 북경의 도서관으로 옮겼다. 중국에서는 장경동 유물들을 대량 반출해나간 스타인, 펠리오, 오오타니 등을 문화재 도굴꾼이자 제국주의의 스파이 등으로 비난하지만, 스타인의 탐사 당시에 중국 정부에서는 타림분지 일대의 잊혀진 실크로드의 고대 문명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스타인이 아니었더라면 지금 장경동의 문서와 유물들이 우리에게 남아 있었을 가능성은 상당히 희박하다.

서양인들의 문화적 침략으로 인식되기도 하는 19-20세기초반의 서양 탐험가들의 발굴과 연구는 사실 보물찾기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 스타인만큼 뛰어난 열정과 탐구심으로 인내롭게 자료를 수집 및 정리, 연구한 학자는 많지 않다. 중국 측에서는 지금도 스타인의 유물들을 영국에서, 혹은 각각의 소장처에서 다시 중국으로 반환해야한다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필자는 이 견해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다.

소도둑 맞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처럼, 스타인 이후 지속된 돈황 장경동 유물의 해외 유출로 인해서 중국 정부에 의해서 정비되기 시작한 돈황석굴은 2000년대 이후 견고한 시멘트의 성곽으로 탈바꿈했다. 석굴들은 유물 보관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굳게 철문으로 닫아걸고 자물쇠를 채웠으며, 관람객은 모두 국가기관의 허가를 받은 후 입장료를 내고 열쇄를 가진 관리인의 뒤를 따라 일부만 볼 수 있다. 일부 석굴 중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하여 외국인은 관람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으며, 일부 석굴 중에는 특굴로 지정되어 있어서 하나의 석굴을 보는데에 200위엔 이상의 돈을 지불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돈황석굴 내부에서는 보존을 명목으로 사진 촬영을 전면 금지하고 있으며, 기촬영되어 출간된 사진의 이용에도 역시 상당한 비용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폐쇄적인 중국의 문화재 보호 정책은 스타인 이후 들이닥친 외국인들의 문화재 탈취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중국의 문화 정책과 연구가 서구 사회에 비해서 비개방적이고 자국 중심주의적으로 진행되는 탓도 있다.

돈황 석굴 전경. 2007년경. 2000년대 이후 돈황석굴은 국가적 지원을 받으며 보수공사를 꾸준히 진행하여, 현재는 무너진 석벽을 모두 시멘트로 보수하고 난간을 만들었으며, 석굴문은 전부 철문을 달아 자물쇠로 걸어 놓아서 허가를 받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다.

시진핑이 새롭게 시작하는 일대일로 정책은 중국을 넘어서서 유라시아 대륙의 경제를 이어간다는 야심찬 포부로 시작하여 고속철로라는 최신식 기술의 물질적 이음새로 연결되고 있지만, 이것이 고대 실크로드의 자유롭고 개방적인 문화 교류의 정신을 이어가는 정책인지에 대해서는 좀 더 살펴보고 주의할 필요가 있다. 실크로드의 길은 원래부터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갈래길의 네트워크이다. 분단된 한반도에서 사는 우리들로서는 과연 현대의 신실크로드에서 어떻게 길을 찾을 수 있을까?

사실 스타인이 타림분지의 실크로드에서 찾아낸 고대 문명은 비록 사막 속에 묻혀서 잊혀진 상태이긴 했지만, 옛 실크로드의 도시 국가들이 중국 뿐만 아니라 인도,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지역의 다양한 언어와 인종과 문화가 결합된 다양하고 개방적인 형태로 발전해왔음이 확인되었다. 실크로드의 개방성과 다양성은 헝가리인으로 태어나 영국인으로 살았던 스타인이 중앙아시아 사막 속에서 자유로운 학문적 탐구심을 발휘하며 평생동안 꾸준히 기록과 촬영을 하면서 힘들게 탐사하여 20세기 초반에야 겨우 재발견된 것이다. 중국 입장에서의 그에 대한 비난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타인이 꾸준히 문헌학과 지리학, 그리고 고고학을 탐구하며 살았던 성실하고 열정적인 학자였다는 점도 인정해야한다.

자국 경제의 이익 추구를 위한 현대 중국의 신실크로드 정책 및 폐쇄적인 문화재 보호 정책과 묵묵한 학문의 길을 자유롭게 가상현실에서 구축해나가는 영국 학자들의 국제돈황프로젝트 사업은 모두 실크로드의 옛 문명을 재발견한 오렐 스타인의 업적에서 촉발된 것이기는 하지만, 추구하는 방향성과 방법은 스타인에 대한 비판만큼 상당히 상반된 방식으로 나아가고 있다.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신실크로드의 재구축 현상 속에서, 한국은, 혹은 나 자신은 과연 어떤 방식과 방향으로 이러한 현상에 기여, 혹은 참여, 혹은 탐사해볼 수 있을 지에 대해서, 각자 진지하게 고민하고 한걸음씩이라도 각자의 길을 꾸준히 걸어가야 할 시기이다.

◆ 주경미(周炅美)

부산외대 동남아지역원 HK연구교수이며, 중앙아시아학회 이사 및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이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공예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 대학원에서 동양미술사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불교 미술 및 공예품을 중심으로 한국을 중심으로 중국, 몽골, 동남아시아 문화 교류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 , 공저서로는 , , , 등이 있으며, 여러 편의 관련 논문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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