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0년간 반도체 산업을 이끌어왔던 ‘무어의 법칙’이 3월에 공식적으로 용도폐기될 것으로 전망된다. 세계 반도체업계는 ‘무어의 법칙을 넘어(More than Moore’s Law)’라는 이름의 전략을 담은 ‘국제 반도체 기술 로드맵’을 공개한다.

과학 학술지 네이처는 반도체 업계의 ‘무어의 법칙’ 종말 선언과 반도체 산업 혁신에 대해 2월 최신호에 기획 보도했다.

무어의 법칙은 인텔의 공동 창업자인 고든 무어가 1965년 ‘일렉트로닉스’라는 잡지에 게재한 글에서 처음 주장한 내용이다. 무어는 당시 18개월마다 반도체 칩의 트랜지스터 개수가 2배씩 증가하고 이에 따라 반도체 성능도 2배씩 좋아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반도체 산업과 기술력은 무어의 예상대로 발전해 왔고 이 이론은 ‘무어의 법칙’으로 불렸다.

인텔 공동창업자인 고든 무어.

◆ 반도체 산업 주도한 ‘무어의 법칙’ 종말 예고

고든 무어의 비전은 수십 년 동안 반도체 산업을 지배했다. 1970~1980년대 휴렛패커드의 계산기나 애플 컴퓨터, IBM PC의 폭발적인 수요는 반도체 제조업체들의 호황을 불러왔다. 반도체 제조업체들은 벌어들인 돈으로 제조장비를 업그레이드했다. 거짓말처럼 무어의 법칙대로 칩의 성능을 높였고 칩 생산단가를 경쟁적으로 줄였다.

미국 텍사스대 컴퓨터산업 분야 경제학자인 케네스 플람 교수는 네이처와의 인터뷰에서 “무어의 법칙에 따른 반도체 산업 기술 로드맵은 믿을 수 없을만큼 재미있는 실험이었다”며 “그 어떤 산업도 모든 산업체가 동의한 로드맵에 따라 기술을 발전시킨 사례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반도체의 집적도는 한계에 도달했다. 실제로 인텔은 무어의 법칙대로라면 2014년에 나올 것으로 예상된 14나노 공정의 CPU 신제품을 2015년 초에야 내놨다. 최근에는 올해 나와야 할 10나노 공정을 적용한 칩을 내년 하반기 양산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기술적 한계로 무어의 법칙이 사실상 깨진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18개월마다 트랜지스터 개수가 2배 집적되고 컴퓨터 성능도 개선된다는 무어의 법칙. 수십 년 동안 무어의 법칙의 반도체 산업의 표준 ‘로드맵’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 90나노 공정 반도체 제조 기술이 등장하면서 반도체 업체들은 기술적 문제에 직면했다. 트랜지스터 집적도가 높아지면서 실리콘 회로 내부의 전자 움직임이 빨라지자 발열 문제가 생겼다. 반도체 회로 재설계를 통해 한 개의 마이크로프로세서에 여러 개의 ‘코어’를 집어넣는 방식으로 우회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특히 발열 문제는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반도체 업계의 중요한 화두가 됐다.

비용 문제도 반도체 업계의 골칫거리가 됐다. 칩 성능을 높이려면 더 작은 크기의 칩에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집적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장비에 투자해야 한다.

3월에 공개되는 ‘국제 반도체 기술 로드맵’에는 더 이상 무어의 법칙을 반도체 기술 개발 전략으로 삼지 않겠다는 반도체 업계의 선언이 담길 예정이다. 대신 스마트폰이나 슈퍼컴퓨터, 클라우드 데이터센터 등 새로운 수요에 맞춘 칩 개발 전략이 가동된다. 이미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반도체산업협회(SIA)는 무어의 법칙을 따르는 기술 로드맵 참여를 중단하고 자신들만의 연구개발 어젠다를 추구하겠다고 발표했다.

◆ 실리콘 대체 물질·양자 컴퓨팅이 대안 될까

네이처는 무어의 법칙 종말 선언과 반도체 산업을 집중 조명하며 실리콘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물질과 양자컴퓨팅 연구를 언급했다. 한계에 직면한 반도체 기술의 새로운 돌파구에 대한 연구가 이미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실리콘 반도체를 대체할 신물질로 2차원 나노물질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탄소나노튜브, 그래핀 등이 차세대 반도체 후보물질로 거론되고 있다. 이들은 물리적·화학적 안정성이 높아 실리콘에 버금가는 반도체 성능을 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반도체 용도로 물성을 변환하거나 대량 생산하기가 어려운 게 단점이다.

구글이 1초에 128큐빗을 처리한다고 밝힌 양자컴퓨터 ‘디웨이브’의 칩.

양자 컴퓨팅 연구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기존 컴퓨터는 0과 1로 표시되는 2진법 논리를 통해 연산한다. 이를 비트라고 하는데 한 비트에 하나의 정보를 저장한다. 양자컴퓨터는 이와는 달리 2진법으로 이뤄진 비트가 아닌 ‘큐빗(qubit)’을 이용한다. 큐빗은 양자역학의 핵심 원리인 ‘여러 상태가 중첩된 상태’를 이용해 ‘0’과 ‘1’의 두 상태를 동시에 저장할 수 있다. 큐빗 수가 늘어날수록 처리할 수 있는 정보량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2013년 7월 구글과 미 항공우주국(NASA)은 양자컴퓨터 ‘디웨이브(D-WAVE) 2’를 개발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를 통해 인공지능과 검색엔진 연구에 나설 계획이라고 전해 양자컴퓨터 상용화가 임박한 것 아니냐는 기대를 갖게 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양자 컴퓨터 상용화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김용수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양자정보연구단 박사는 “양자 컴퓨터 상용화 시기는 솔직히 예측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양자역학의 원리를 이용한 큐빗의 상태를 얼마나 잘 유지하면서 큐빗의 개수를 늘리는 게 핵심 과제”라며 “예측하긴 어렵지만 10년 내에 상용화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