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 갤럭시 등 고가폰이 지배하던 스마트폰 시장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합리적인 가격에 뛰어난 성능까지 겸비한 보급형 스마트폰이 소비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2~3년 전만 해도 국내 스마트폰 10대 중 중저가폰의 비중은 1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는 10대 중 3대를 넘어섰고, 이 비중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스마트폰 산업이 변혁기에 진입한 것이다. 조선비즈는 중저가폰 시장의 성장 배경을 알아보고, 스마트폰 산업의 미래를 짚어본다. [편집자 주]

“폭스콘이 처음 보내온 시제품은 외관이 지나치게 번들거려 얼굴이 비칠 정도였습니다. 화려한 무늬가 새겨져 있거나 미세한 크기의 구멍이 여러 개 뚫린 시안(試案)도 있었어요. 모두 돌려보내면서 디자인을 가급적 단순하게 바꿔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랬더니 우리의 요구를 바로 반영한 제품을 보내오더라구요.”

2015년 SK텔레콤이 독점 출시한 보급형 스마트폰 ‘루나’를 최초로 기획한 TG앤컴퍼니 관계자의 말이다. TG앤컴퍼니는 SK텔레콤이 통신사 자체 기획폰에 관심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삼보컴퓨터 시절부터 친분이 있던 대만 폭스콘을 SK텔레콤과 연결시켰다. 이후 폭스콘이 시제품을 보내면 TG앤컴퍼니와 SK텔레콤이 수정사항을 전달하는 과정이 수차례 반복됐다. 그렇게 탄생한 루나는 지난해 국내 휴대폰 시장에서 중저가폰 돌풍을 일으켰다.

SK텔레콤은 2015년 TG앤컴퍼니와 보급형 스마트폰 ‘루나’를 공동 기획한 데 이어 올해에는 중국 TCL-알카텔과 협력해 두 번째 자체 기획폰 ‘쏠’을 시장에 내놨다. 사진은 SK텔레콤의 광고 모델인 AOA 멤버 설현이 쏠을 들고 있는 모습.

불과 1~2년 전만 해도 국내 이동통신사(이하 이통사)들은 삼성전자, 애플, LG전자 등 스마트폰 시장의 강자들이 100만원 안팎의 고가폰 신제품을 내놓으면 군말없이 해당 제품을 가져다 팔았다. 그러나 2015년부터 이런 ‘갑-을’ 구조가 변화할 조짐이 보인다.

핵심 부품의 범용화 등 스마트폰 제조 기술의 문턱이 낮아지면서 중국 제조사들이 루나의 사례처럼 이통사의 요구사항을 반영한 ‘맞춤형’ 저가 스마트폰을 개발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제조사가 이통사에 먼저 보급형 전용폰 기획을 제안하는 일도 잦아지고 있다. 중저가폰의 가격은 30만~40만원가량이다.

통신업계 한 관계자는 “중국 선전을 중심으로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뛰어난 저가폰을 제조할 수 있는 기업들이 크게 늘었다”며 “고가폰에 버금가는 성능과 디자인을 갖춘 스마트폰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게 만든 제조 환경의 변화가 중저가폰 인기의 일등공신"이라고 말했다.

김용석 성균관대 정보통신학부 교수는 “스마트폰 제조업체들이 다양한 분야의 파트너사와 협력해 특정 고객군을 겨냥한 스마트폰을 선보이는 일이 앞으로 더 많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 저가폰 제조 생태계 주도하는 중국

중저가 스마트폰 제조의 중심지는 단연 중국이다. 특히 중국 광둥성(廣東省)의 선전(深圳)과 둥관(東莞) 지역에는 화웨이, ZTE 등 중국을 대표하는 스마트폰 제조사들과 새롭게 떠오르는 오포, 비보 등의 업체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삼성전자, 소니 등 글로벌 대기업뿐 아니라 ‘루나’를 제조한 대만 기업 폭스콘의 공장도 선전에 자리잡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선전과 둥관 지역에는 스마트폰 제조에 필요한 모든 인프라가 갖춰져 있다고 보면 된다”면서 “부품 업체도 품목마다 수십~수백개씩 몰려있다 보니 가격 경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스마트폰에 탑재되는 반도체 관련 기업들도 이 지역에 많다. 화웨이의 반도체 자회사인 하이실리콘과 ZTE가 설립한 ZTE 마이크로 일렉트로닉스가 대표적이다. 삼성전자의 타이젠 운영체제(OS)를 처음 탑재한 스마트폰 ‘삼성 Z1’에 AP를 공급한 스프레드트럼과 올위너, 락칩 등 모바일 AP 제조업체들도 선전에 기반을 두고 있다.

화웨이 관계자는 “최근 중국도 경제 상황이 녹록지 않고 인건비가 오르면서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으로 공장을 옮기는 기업이 늘고 있지만 선전 지역은 여전히 최고의 스마트폰 제조 생태계를 갖추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둥관에 있는 스마트폰 제조업체 원플러스의 한 직원이 생산 중인 제품의 카메라 성능을 점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구글 안드로이드 OS의 존재도 스마트폰 제조업체 증가에 크게 기여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제조사들은 스마트폰 1대당 2~5달러 수준의 로열티를 구글에 지급하기만 하면 애플(iOS)이나 삼성전자(타이젠)처럼 자체 OS가 없어도 안드로이드 기반의 스마트폰을 만들 수 있다.

영국 인터넷 시장조사기관 오픈시그널에 따르면 2015년 1~8월 세계에 출시된 안드로이드 기기는 총 2만4093종이다. 2013년 1만1868종, 2014년 1만8796종에 이어 해마다 크게 늘고 있다.

◆ 저가폰 성능 끌어올리고 원가 낮춘 ‘하드웨어 플랫폼’

중저가폰이 국내외에서 인기를 끄는 이유는 가성비 때문이다. 굳이 고가폰을 사지 않아도 될만큼 중저가폰의 성능은 손색이 없어졌다. 그러면서 가격은 고가폰의 절반 이하다.

이처럼 중저가폰의 가성비가 높아진 것은 하나의 ‘하드웨어 플랫폼'을 바탕으로 여러가지 비슷한 모델을 만드는 ‘규모의 경제'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플랫폼이 같은 제품을 대량 생산해 품질을 안정화하는 동시에 원가를 낮추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루나가 대표적인 사례다. 루나는 폭스콘이 자회사인 인포커스를 통해 출시한 보급형 스마트폰 ‘M812’와 디자인, 성능이 거의 비슷한 제품이다. 이 때문에 루나 출시 당시 일각에서는 “M812를 루나로 이름만 바꿔서 도입한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왔다.

통신업계 한 관계자는 “폭스콘이 기본 모델인 M812를 고객사인 SK텔레콤과 TG앤컴퍼니의 요구사항에 맞춰 루나로 개조했다고 봐야 한다”면서 “국내에서 루나가 첫 사례이다 보니 낯설게 느껴졌을 뿐 외국에서는 종종 시도되는 제품 출시 전략”이라고 설명했다.

SK텔레콤이 지난 1월 출시한 두 번째 자체 기획폰 ‘쏠’도 중국 TCL의 자회사인 알카텔 원터치가 2015년 3월 해외에서 출시한 저가 스마트폰 ‘아이돌3’와 비슷한 부분이 많다. 두 제품 모두 5.5인치 풀HD(고화질) 디스플레이와 1.5기가헤르츠(GHz) 퀄컴 옥타코어 AP, 2910밀리암페어아워(mAh) 용량 배터리 등을 탑재했다. 전면과 후면에 각각 800만 화소와 1300만 화소 카메라를 장착한 것도 같다.

중국 TCL의 자회사인 알카텔 원터치가 2015년 3월 해외에서 출시한 스마트폰 ‘아이돌3’(왼쪽)와 SK텔레콤이 TCL-알카텔과 함께 지난 1월 내놓은 스마트폰 ‘쏠’(오른쪽)

주영민 SK텔레콤 스마트디바이스 기획팀 매니저는 “파트너사가 유사한 제품을 별도의 브랜드로 출시하는 걸 ‘베리에이션(variation) 모델’이라고 한다”면서 “쏠의 경우 TCL-알카텔 측에 요청해 LG가 개발한 배터리 셀을 장착하는 등 아이돌3와의 차별화를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SK텔레콤은 묵직한 느낌의 스마트폰을 좋아하는 서양인들과 달리 한국 소비자들은 날렵하고 가벼운 기기를 선호한다는 점도 TCL-알카텔에 전했다. 그 결과 쏠 무게는 134g으로 아이돌3의 무게(141g)보다 7g 가벼워졌다. 조승현 SK텔레콤 스마트디바이스 기획팀 매니저는 “TCL-알카텔에 쏠의 외관 재질도 더 부드럽게 제작해달라고 주문했다”면서 “서양 소비자들은 돌처럼 거칠고 남자다운 재질을 선호하지만 한국인들은 세련되고 부드러운 재질을 더 좋아한다”고 말했다.

통신사만 스마트폰 제조사와 협업을 하는 건 아니다. 글로벌 음료업체 펩시는 2015년 10월 중국에 10만원대 저가 스마트폰 ‘P1’을 출시했다. 제품 제조는 중국 선전에 있는 스마트폰 제조업체 쿠비(Koobee)가 맡았다. P1은 5.5인치 풀HD 디스플레이와 미디어텍의 MT6592 AP, 3000mAh 용량 배터리, 1300만 화소 카메라(후면) 등을 장착했다.

◆ 값싼 부품 등장에 스마트폰 제조업체 급증

전문가들은 스마트폰 산업이 ▲기술의 상향 평준화 ▲부품 단가 하락 ▲진입장벽 붕괴 등의 3단계를 거친 PC 산업을 그대로 쫓고 있다고 말한다. 과거 고가 PC 시장이 붕괴된 이후 저가의 조립 PC 시장이 형성된 것처럼 서서히 불기 시작하는 중저가폰 열풍도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1990년대까지 PC 산업은 고가 부품을 중심으로 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통했다. 중앙처리장치(CPU), 메모리, 그래픽카드 등 PC 부품의 낮은 기술 완성도와 부품 제조업체의 독과점화로 중소기업이 PC를 대량 생산하기에는 진입 장벽이 높았다.

하지만 PC 부품업체들 간 기술 편차가 줄고 경쟁의 중심이 가격으로 옮겨가면서 부품 단가도 점차 하락하기 시작했다.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는 물론 일반 소비자도 필요한 부품을 저렴하게 사다가 PC를 조립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델, HP, 삼성, LG 등 일부 유명 브랜드가 장악하던 PC 시장에 수많은 저가 브랜드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스마트폰 산업 역시 애플의 아이폰이 처음 등장한 2000년대 중반부터 불과 수년 전까지는 일부 고가폰 위주로 수요가 발생했다. 그러나 스마트폰에 탑재되는 여러 기술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업체 간 평준화를 이뤘다. 비슷한 사양에 더 낮은 단가를 자랑하는 부품이 속속 등장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 것이다.

서울시내 한 스마트폰 전시장에 방문한 시민들이 제품을 구경하고 있다.

예컨대 과거 스마트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응용프로세서(AP) 시장은 미국 퀄컴이 독차지했지만 현재는 중화권 업체들이 가격 경쟁력을 무기 삼아 거센 추격을 하고 있다. 대만의 반도체 설계업체 미디어텍이 개발한 AP의 경우 미국 퀄컴이 만드는 ‘스냅드래곤’ AP보다 30~50% 저렴하게 판매된다.

미국 시장조사기관 스트래티지애널리틱스(SA)가 2015년 11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퀄컴 AP와 미디어텍 AP의 평균판매단가(ASP)는 각각 15.27달러, 9.71달러다. 스프레드트럼, 올위너, 락칩 등 중국 모바일 AP 제조업체들도 스마트폰의 저가화를 이끄는 대표적인 기업들이다.

고품질의 부품을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면서 스마트폰 제조에 뛰어드는 업체들도 자연스럽게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오픈시그널에 따르면 세계 스마트폰 제조업체(안드로이드 기준) 수는 2012년 500개에서 2015년 1300여개로 두배 이상 늘어났다.

배은준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성숙기 스마트폰 3대 사업모델이 흔들린다’는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대부분의 신생 스마트폰 제조업체들은 기술 혁신보다는 가성비를 높이기 위한 사업모델 혁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