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개성 공단에 들어갈 때만 해도 희망으로 가득 찼는데, 이제는 한숨만 나오네요”

2월 11일 오후 12시 30분, 경기 파주시 군내면 통일대교 남단. 남북을 잇는 육상 관문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왕복 8차선 도로에는 외국인 관광객을 태운 관광버스와 군용 차량만 보였다. 인적은 드물었다.

개성공단 철수가 시작된 11일 오후 1시 한 입주기업의 트럭이 검문소를 통과해 통일대교 남단을 빠져나오고 있다.

오후 1시가 되자 짐을 실은 11톤급 중형 트럭 1대가 남북 출입 사무소를 지나 통일대교를 건넜다. 이후 10분에 한대씩 트럭이 줄지어 내려왔다.

검문소를 지난 트럭들이 도착할 때 마다 개성공단 입주 기업 관계자들이 차량의 소속을 확인했다. 트럭에 실린 짐은 많지 않았다.

“시간도 안 주고 (공단을) 폐쇄하면 어떡합니까? 원단이라도 건져 보려고 (아침 일찍 트럭을) 들여 보냈는데 북측이 하나도 못 가져가게 합디다. 답답하고 짜증만 나네요.”

도착하는 트럭을 기다리던 한 개성공단 입주기업 대표가 언성을 높였다. 다른 기업 관계자들은 굳은 표정으로 말문을 닫았다. 취재진이 말을 걸어도 대답을 피했다. 일부는 “그만하라”며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고개를 돌렸다.

“(개성) 공단에 있는 것을 모두 가져올 생각 뿐, 아무 생각이 없다.”

개성공단을 다녀온 한 입주기업 직원은 “북한에서 설비는 아예 가지고 못 가게 한다. 원단도 사정 사정해서 겨우 몇 개 들고 나왔다. 지금이라도 서둘러야 한다. 내일까지 뭐라도 들고 나오는게 최선”이라고 했다.

경기 파주시 군내면 통일대교 위에서 개성공단 입주기업 관계자들이 차량을 기다리고 있다.

◆ 북한 “한국 기업 시설, 물자, 제품 동결, 인민위원회 관리하에 둔다" 발표 사실상 몰수

입주 기업들은 자재와 장비, 완제품을 반출하려면 북한이 협조해야 하는데, 협력 관계에 금이 간 이상 철수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우려했다.

한 의류업체 사장은 “최악의 경우 공장을 해체해도 설비는 못 가지고 나올 것 같다. 북한에서 가만 두겠나? 북한이 직원 5만5000명 퇴직금으로 1억 달러를 요구한다는 말도 있다. 토지비랑 기타 비용을 더하면 우리에게 얼마를 더 요구할 지 모른다”고 했다.

기업들은 “개성 공단에 있는 짐을 가지고 오기 위해 허락된 인원이 회사 당 1명에 불과하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2월 13일까지 가져올 수 있는 자재와 장비, 완제품은 사실상 극히 일부에 제한될 것으로 보고 있다.

기업들의 우려는 곧 현실이 됐다. 북한은 이날 오후 "개성의 남측 인원들을 2016년 2월 11일 17시(우리 시각 오후 5시 30분)까지 전원 추방한다. 남측 기업과 관계 기관의 설비, 물자, 제품 등 모든 자산을 전면 동결하고 개성시 인민위원회가 관리한다"고 발표했다.

북한은 또 “11일 10시(우리 시각 10시 30분)부터 개성 인접 군사 분계선을 전면 봉쇄하고 남북 서해선 육로를 차단하며 개성공업지구를 군사통 제구역으로 선포한다"고 밝혔다. 사실상 우리 기업들의 재산을 몰수하겠다는 선포다.

◆ 일부 기업 대표 “공단 가동 재개돼도 안 돌아가”

개성공단기업협회(사단법인)는 11일 오후 5시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긴급이사회를 열어 비상대책위원회를 발족했다. 이 협회에는 개성공단에서 생산 시설을 운영하는 123개 기업이 가입돼 있다.

정기섭 개성공단기업협회장은 “오늘부로 개성공단은 사망선고가 내려졌다. 기업의 피해는 눈앞의 현실로 굳어졌고, 정부의 후속대책과 보상을 요구할 것이다. 피해를 보상해주지 않으면 소송도 불사하겠다”고 말했다.

정 회장은 “정부가 입주 기업과 협의했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상황을 악화시킨게 야속하고 원망스럽다. 입주 기업의 70%가 개성공단에서만 사업을 했기에 이번 일로 아예 문을 닫는 곳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정부의 가동 중단 선언을 사실상 ‘공단 폐쇄’로 받아들이던 기업들은 북한의 전격적인 기업 재산 동결 조치가 발표되자 망연자실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개성공단에서 공장을 운영 중인 한 의류업체 대표는 “설마 했는데 최악의 상황이 왔다. 개성공단은 사실상 끝났다. 공단이 재개돼도 다시 돌아갈 생각이 없었지만, 이젠 돌아갈 수도 없게 됐다”고 말했다.

개성공단기업협회는 이날 한 업체당 한 사람만 북한에 갈 수 있도록 한 정부의 조치를 철회해줄 것을 요청할 계획이었으나 북한의 기업 재산 동결 소식이 전해지자 다시 긴급 회의에 들어갔다.

경기 파주시 군내면 통일대교 남단.

공단에 뒤늦게 입주했거나 영세 기업인 경우 보험 가입이 안 돼 있어 가동 중단 피해를 고스란히 떠 안게 될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낮은 인건비 때문에 개성공단에 진출한 기업들은 국내 대체 생산지 시설을 찾지 못해 해외로 나가야 한다. 한 입주 기업 관계자는 “해외에 새로운 생산 시설을 마련하려다 시간만 낭비하고 거래처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크다. 이제 돌아갈 곳도 없다"며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