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관 구종명 불망비

1906년 10월 25일 목포에 살던 일본인 후지키 히로스케(藤木弘助)가 오경오라는 사람을 때려죽였다. 빚을 갚지 않았다고 했다. 이에 아들 오수민이 찾아가 후지키 배를 칼로 갈라 죽이고 창자를 볏짚에 담아 무안경무서에 자수했다. 무안경무서는 1897년 개항한 목포 치안을 맡은 관청이다. 격분한 일인과 조선인 사회 사이에서 경찰관 구종명(具鍾鳴)이 "서로 죽이고 죽였으니 이걸로 끝"이라고 중재했다. 나라 꼬라지가 엉망진창이던 그때 목숨을 건진 조선인들은 경무서에 의인(義人) 구종명을 기리는 영세불망비를 세웠다.

구종명이 근무한 경무서는 죽동에 있었다. 죽동은 유달산 북쪽 기슭이다. 개항 후 대한제국이 외국인에게 토지를 경매할 때 일본은 바다와 맞닿은 산 남쪽 기슭을 차지했다. 훗날 '해 뜨는 언덕을 먹었다'고 기록한 이 땅에 일본은 네모 반듯한 신시가지를 조성했다. 조선인은 산 북쪽 공동묘지 터에 거주지를 만들었다. 하수도도 상수도도 없었다. 그저 집들이 무계획, 무질서, 무분별하게 산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었다. 1980년대까지 초가집들이 그 기슭에 붙어 있었다.

그런 마을 가운데 하나가 다순구미였다. 올해 여든여섯 된 황순자는 다순구미에서 태어나 86년째 다순구미에서 산다. 유달산 남서쪽, 일본 신시가지 서쪽 비탈에 있는 다순구미는 개항 이전부터 존재한 마을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다. 황순자는 기억하지 못한다. 도대체 몇 대째 자기네가 다순구미에 살아왔으며, 도대체 자기가 죽기 전 다순구미를 떠나기나 할는지. 섬에서 온 뱃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개항 후 부두 노동자들도 섞여 살았던 달동네, 이 가난한 골목길에 지금은 외지인 발길이 잦다.

목포 이야기

목포의 '목'은 여울목, 길목 할 때 그 목이다. 목포는 서해와 남해 바닷길 길목에 있는 포구였다. 해안선이 복잡하고 뻘이 깊어 사람 살기보다는 군사 요충지로 역사가 오래다. 그래서 목포 역사는 매립의 역사다. 바다를 메워 집을 짓고 뻘을 덮어 큰 배가 정박할 항구를 만들며 목포가 성장해왔다. 목포 땅 80%는 바다였다. 호남선 목포역 또한 바다 한가운데에 있었다.

목포 유달산 기슭에 있는 다순구미 마을 골목길. 가난한 사람들이 대를 이어 살며 흔적을 남긴 담벼락에는 세월의 향기가 묻어 있다. 오른쪽 사진은 다순구미를 그린 '기억의 풍경'. 성옥기념관 학예실 장인 화가 조순현의 작품이다.

신시가지 꼭대기에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군에게 군량미로 보이게 만든 노적봉이 있다. 일본인들은 그 아래에 영사관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 바윗덩이에 속아서 300년 전에 조선을 먹지 못했구나!" 영사관 신축 이후 100년이 흘렀다. 도로 구획은 물론 주요 건물들도 그때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며 그대로 서 있다. 곳곳에 남아 있는 일본식 건물들은 보는 이에게 낯선 충격을 준다.

붉은 벽돌로 지은 영사관은 목포시청, 목포도서관으로 쓰였다가 근대역사박물관이 되었고 한 블록 건너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도 역사박물관으로 변했다. 영사관 건물 앞에는 국도 1, 2호선 기점 기념비가 서 있다.

일본 갑부 우치다니 만페이(內谷萬平)가 지관을 시켜 고른 길지에 만든 정원도 남아 있다. 목포 기업인 이훈동이 해방 후 구입해 보존한 이 정원은 호남에서 가장 큰 일본식 정원이다. 정원에는 향나무가 주종인 숲이 있고 조선 팔도에서 모은 석물들이 곳곳에 보인다. 드라마 '모래시계' '야인시대'를 이 정원에서 촬영했다.

일본 목사가 지은 당시 교회는 창고로 쓰이고, 골목길마다 보이는 크고 작은 일식 주택들은 방앗간, 카페, 공예점으로 변했다. 조선과 일본 건달들이 맞붙곤 했던 오거리 일본 불교 사찰 동본원사는 교회로 쓰이다 문화원으로 변했다. 석조 건물 자재는 대부분 목포형무소 죄수들이 캐서 공급했다. 그 거리를 걷는 경험은 낯설고 참신하다. 대부분 1990년대 사라질 뻔한 건물들인데 '부끄러운 역사 또한 우리 역사'라는 공감대로 살아남았다.

100년 전 건설된 계획도시가 지금 봐도 제대로 정비된 도시라 선진 일본 기술에 감탄하는 사람들이 많다. 베테랑 문화해설사 조대형이 말했다. "20년 되도록 목포 역사를 안내하지만 미워도 감탄스러운 일본인들"이라고. 하지만 시가지 기본 설계는 조선 정부가 용역을 준 네덜란드 기사 스테든이 했다. 도로 폭 또한 8~15m 네 종류로 엄격하게 구분했고 택지 또한 엄격하게 용도와 매립 여부를 구분했으니, 꼭 주눅 들어 감탄만 할 이유는 없다. 어찌 됐든 목포에 가면 우리는 역사 교과서에서 읽어본 그 역사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다순구미와 째보선창

다순구미에서 86년째 살고 있는 할머니 황순자.

다순구미는 달랐다. '다순'은 '따숩다'는 말이고 '구미'는 여진족 말로 '움푹 들어간 후미'라는 뜻이니 다순구미는 해변에서 푹 들어간 양지 마을이라는 뜻이다. 뜻을 한자로 적어 온금동(溫錦洞)이라고도 한다. 가난한 조선인들 마을이다.

바다와 맞닿은 갯벌을 다순구미 사람들이 남부여대하며 매립해 땅으로 만들었다. 땅 한가운데를 디귿자로 파내고 배들 정박시킬 선창도 만들었다. 일직선으로 뚫린 길이 선창에서 마을 쪽으로 90도로 꺾어져 다시 나왔다. 사람들은 "언청이랑 비슷하다"며 선창을 째보선창이라고 불렀다. 째보선창은 1981년 소년체전 때 매립됐다. 도로는 그대로 남아 있다.

뭍이 된 그 바다에 집들이 들어서고 뱃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다. 다순구미 아랫마을 사람들이다. 째보선창에서 멀리 마을 뒷산 여근바위에 기도를 한 뒤 바다로 간 뱃사람들은 며칠씩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다 물때가 나쁜 조금사리가 되면 남정네들은 집으로 와 아랫목에 몸을 뉘었다. 다순구미 사람들은 그때 생겨난 아이들을 '조금새끼'라고 불렀다. 생일이 똑같거나 비슷한 조금새끼들은 어른이 되면 또 바다로 갔다. 그러다 풍랑을 만나면 며칠 뒤 다순구미에는 같은 날 여러 집에 제사가 열렸다.

윗마을 사람들은 조선소에 다녔다. 남자도 다녔고 여자도 다녔다. 황순자도 다녔다. 다섯 아이 어릴 때는 바느질을 했고 애들 다 크고서 조선소에 나갔다. 이른 아침 아이들 밥 해먹이고 설거지를 하고 몸뻬바지 차려입고 출근했다. 하루 온종일 철선과 목선에 '뼁끼칠' 하고서 거지도 그런 거지가 없는 꼴로 집으로 와서 1922년 정인호라는 사람이 만들어준 아랫마을 우물 '큰샘'에서 양동이로 물을 길어다 밥을 하고 아이들을 먹였다. 아이들 얘기가 나오면 황순자는 눈물이 난다.

"내가 맏아들이랑 맏딸 친구들을 보면 눈물이 나. 걔들은 국민학교밖에 못 보냈거든. 그러면 걔들이 그래. '엄니, 대학 간 친구들도 백수들 많아요'라고. 그러면 더 눈물이 나." 큰아들은 엄니랑 같은 조선소 다니며 용접일로 돈을 벌었다. '지들 위해 썼으면 부자 됐을' 돈을 벌었지만 동생들 학교 보내느라 저축도 못했다고 했다. 세 칸 집에 일곱 식구 살다가 차례차례 시집 장가보내고 황순자는 지금 혼자 다순구미에 산다. 대문 기둥에는 연전에 하늘로 간 영감 문패가 그대로 걸려 있다. '막내아들이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해서' 떼질 못한다.

다순구미 골목에 그 눈물이 발목까지 찰랑거린다. 젊은이들 다 떠나고 마을은 빈집투성이다. '바삐 오면 숨이 왔다갔다하는' 깔끄막이(비탈)에는 노인들 잡고 다니라고 스테인리스 난간이 설치돼 있다. 가끔 마주치는 소방전 박스와 박스 위에 붙여놓은 무의미한 '주차 금지' 스티커에 놀라기도 한다. 무계획, 무질서로 페인트칠한 담벼락은 각양각색이라 더 놀랍게 예술적이다. 에게해(海) 어느 섬을 닮은 아름다운 풍경이다.

일본인 거리에 남아있는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 지금은 근대역사 박물관이다.

그 풍경 속에 여든 넘은 황순자는 두 무릎 관절 다 버리고 인공으로 박아넣었다. 그녀가 말한다. "애들 학교 보내고 할 때가 좋습디다. 힘들었는디, 옹기종기 살 때 그때가 좋긴 좋았어. 먹을 거 있으면 고구마, 김치 다 나눠 먹고. 멀리는 못 나누고 윗집 아랫집 세 집이서. 지금은 쓸쓸하지. 그래도 여기 계속 살고 싶어. 혼자 걸을 수 있으니까 자식들이랑 안 살 거여." 이 땅 그 어떤 어머니가 자식에 짐 되려 할까. 지금 다순구미에서는 그런 우리들 어머니들이 추억을 먹고 산다.

그래서 목포를 찾는 사람들은 다순구미를 빼놓지 않는다. 번듯한 볼거리 없지만 어느 틈에 예술이 돼버린 골목길에서 불쑥불쑥 마주치는 '엄니'들, 그 엄니들이 들려주는 포장 안 된 민낯의 역사를 다순구미에서 듣는다. 이미 확정된 재개발 계획이 시행되면 몇 년 사이에 폭삭 무너져내릴 우리네 가슴 먹먹한 옛 기억을 듣는다. 번듯한 원도심 신시가지에서 다순구미 추억까지 걸어서 30분이다.

100년 전에 멈춰진 시간

21세기 들어 하당 지역이 매립되고 신도시로 개발되면서 일본인들 살던 원도심과 유달산 북쪽 구도심에 흐르는 시간은 멈췄다. 한 도시에 여러 작은 도시들이 칼로 자른 두부처럼 섞임 없이 공존한다. 그 100년 전과 50년 전과 21세기 현재 사이 물리적 공간 거리는 불과 30분이다. 다순구미에서 일본 영사관이 30분이고 영사관에서 삼학도가 30분이다. 삼학도에서 하당신도시 평화광장이 또 30분이다. 그 30분 국경을 넘지 못해 다섯 아이 키워낸 황순자는 86년째 유달산 양지 바른 기슭에 앉아 바다를 바라본다. 가슴에는 몇백 광년 저 멀리 하늘로 간 영감이 웃고 있을 터이고.

[목포 여행수첩]

〈볼거리〉 1.원도심 개항 이후 일본이 개발한 거리. 일본 영사관,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이 대표적. 성옥기념관도 필수. 추사를 비롯한 각종 옛 작품들. 예약하면 그 뒤에 있는 이훈동 가옥 정원도 견학 가능. 월, 공휴일 휴관. www.sungok.or.kr , (061)244-2527 2.다순구미 다순구미 골목길들과 입구에 있는 조선내화공장 건물. 3.각종 박물관 신안 보물선 유적이 있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자연사박물관과 남농 선생 작품을 모아놓은 부설 문예역사관 필수.

〈맛집〉 아래 세 식당 모두 밥때에는 예약하지 않으면 자리를 잡기 힘들다. 1.선미식당 삼학도 부근. 갈치찜(2만8000원~), 매운탕(3만원~), 회덮밥(1만원) 기타 등등 가정식. (061)242-0254, 신정동 1357-18 2.보길도 전복마을 하당 평화광장. 전복 구이, 회, 무침, 죽 등 전복 코스 요리. (061)282-2852, 옥암동 1098-18 3.선경준치회집 다순구미 입구. 조기, 갈치 등 각종 찜과 구이는 1만2000원, 준치, 병어 회무침 8000원, 아구찜(1만2000원) 등. (061)242-5653, 온금동 186

〈묵을 곳〉 1.하당 평화광장 주변에 1급~모텔 밀집. 인터넷에서 검색할 것. 하당 샹그리아호텔(www.shangriahotel.co.kr)도 괜찮다. 2.게스트하우스 목포 1935 옛 한의원인 춘화당 한옥을 개조해 만든 숙박시설. 말은 게스트하우스지만 비용이나 시설은 고급이다. 원도심 오거리에서 걸어서 5분. (061)243-1935, 죽동 49-3, cafe. daum.net/mokpo1935

〈기타 정보〉 1.목포시 문화관광과 (061)270-8432, tour.mokpo.go.kr 2.목포시티투어 화~일 오전 9시 30분 목포역 앞 시티투어 승강장 출발. 5000원. 유달산~삼학도 등 주요 관광지 순환. (061)245-30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