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일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을 서비스하는 카카오가 음원 서비스 '멜론'을 운영하는 로엔엔터테인먼트를 1조8700억원에 인수했다. 이는 SK텔레콤이 국내 1위 케이블TV 업체인 CJ헬로비전을 사들인 금액(1조원)의 약 두 배에 달한 대규모 인수·합병(M&A)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규모의 M&A라면 반드시 개입해 거래를 주도해왔던 외국계 IB(투자은행)나 국내 증권사가 이번에는 철저히 배제됐다. 외부의 재무적 자문이나 중개 없이 거래가 완료된 것이다. 이번 M&A는 벤처투자업체 출신인 임지훈 카카오 대표와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 등에서 카카오로 합류한 인력들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IT와 금융이 결합한 핀테크(Fintech· 금융과 기술의 합성어)가 송금·공과금 납부·대출 개인 금융 부문에서 급속히 영역을 확장해나가는 데 이어, M&A와 같은 기업 금융 부문에서도 IT(정보기술)와 기업 내부 인력이 금융기관의 기능을 대체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영국의 투자은행 바클레이스의 안토니 젠킨스 전 최고경영자(CEO)는 "금융에도 우버 모멘트(Uber moment·키워드 참조)가 오고 있다"며 "향후 10년 안에 금융 관련 직군 중 절반 이상은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M&A, 투자은행 도움 필요 없다

작년 10월 말 삼성SDI의 화학 부문을 롯데케미칼로 매각하는 과정에서도 양사는 금융권의 도움 없이 거래를 마무리했다. 로펌과 회계법인이 법률 검토와 재무 실사를 담당했을 뿐이다. 삼성SDI 관계자는 "양사 간에 이미 M&A에 대해 합의한 상황에서 투자은행은 불필요했다"고 말했다.

심지어 유명 투자은행이 M&A 과정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고도 계약 발표 당시 이름만 올리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IB업계 관계자는 "대형 거래를 중개했다는 실적을 외부에 알리기 위해 이름만 얹어놓고 실제 수수료는 받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거래를 중개해주는 투자은행의 역할이 축소된 것은 대기업끼리 진행하는 계열사 M&A가 늘어나고 내부 역량이 강화됐기 때문이다. 작년 삼성·롯데 간 빅딜, SK텔레콤의 CJ헬로비전 인수 등은 모두 재계 10위 안에 드는 대기업 간 거래였다. 이런 경우에는 대부분 기업의 총수·최고경영자(CEO)들 간의 결단을 통해 M&A가 이뤄진다.

게다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투자은행·증권사 등에서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벌어지면서 기업 가치 평가·자문 등을 해왔던 인력들이 대거 기업으로 유입됐다. 결국 기업 입장에서는 내부 인력을 활용해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외주를 맡기지 않는 것이다.

미래 성장성을 보고 자발적으로 금융계를 떠나 기업으로 오는 경우도 많다. 작년 세계 최대의 인터넷 기업 구글의 최고재무책임자(CFO)로 영입된 월가의 '파워 우먼' 루스 포랏이 대표적이다. 그는 세계적인 투자은행 모건스탠리의 CFO(최고재무책임자) 자리를 박차고 구글로 자리를 옮겼다.

한 회계법인 고위 관계자는 "아직 해외 기업과의 거래, PEF(사모투자펀드)에서 매물로 내놓은 기업의 M&A 등에서는 투자은행이 할 일이 있지만 점점 역할이 줄어드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대출도 스마트폰으로 해결

송금·공과금 납부부터 투자자문 등 개인을 대상으로 한 금융 산업도 IT 발달에 따라 자리가 축소되고 있다. 지난 18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발표된 '로보 어드바이저' 육성 대책이 대표적이다. 로보 어드바이저란 인공지능 소프트웨어(SW)가 시장과 개인의 자산 등을 분석해 자동으로 투자 종목·펀드 등을 추천해주는 서비스다. 그동안 투자자문은 오프라인 지점을 찾아가서 대면(對面) 서비스를 받아야 했지만,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간단히 처리할 수 있다.

송금·공과금 납부·대출 등 기초적인 금융 서비스는 이미 핀테크 업체들이 깊숙이 침투한 상태다.

비바리퍼블리카·8퍼센트 등의 스타트업은 스마트폰에서 공인인증서 없이 비밀번호 하나로 간편하게 송금할 수 있도록 하거나, P2P(개인 간 거래) 대출을 제공한다. 굳이 지점에 갈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렇다 보니 은행의 오프라인 지점은 점점 역할이 줄어들고, 혹독한 인력감축이 진행되고 있다. 영국계 은행 HSBC는 작년에만 약 2만5000여 명, 스탠다드차타드는 1만5000여 명을 각각 줄였다. KB·우리·신한은행 등 국내 은행들도 지점 감축, 구조조정 등을 진행 중이다.

서강대 정유신 교수(경영학)는 "금융 산업의 경계가 흐려지고 파괴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며 "금융계는 이를 위기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기업 역량, IT를 활용해 새로운 사업을 찾아나서는 데 집중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버 모멘트(Uber Moment)

새로운 기술, 기업의 등장에 따라 기존 산업의 체제가 완전히 바뀌고 위협받는 순간을 우버 모멘트라고 한다. 미국의 차량 공유 서비스인 '우버'는 2009년 창업한 이후 6년 사이에 미국, 유럽, 인도 등 세계 각지에서 기존 택시 산업을 위협하고 있다. 빈 방 공유 서비스인 '에어비앤비', 사무실 공유 서비스인 '위워크'도 호텔·숙박업과 부동산업계를 변화시키며 우버 모멘트를 이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