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9일 세계 최대의 IT(정보 기술) 전시회 'CES(Consumer Electronics Show) 2016'이 열린 미국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LVCC). 수많은 관람객으로 붐비는 현장 가운데서도 유독 길게 줄이 늘어선 곳이 있었다. 미국의 가상현실(VR) 기기 업체 '오큘러스' 전시관이었다. 한번 입장하려면 최소 10~15분은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이 회사는 미국 영화사 '21세기 폭스'와 함께 SF(공상과학) 영화 '마션'의 가상 현실 버전을 공개했다.

가상현실 기기를 머리에 덮어쓰면 사용자는 화성에 불시착한 우주인이 된다. 고개를 숙이면 황량하고 붉은 화성의 땅바닥이 보이고, 머리를 들면 모래 바람이 몰려오는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다. 체험하는 20여분 동안 화성으로 우주여행을 다녀온 듯 생생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음악에 맞춰 춤추는 드론들 - 6∼9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16’에서 프랑스 업체 ‘패럿’이 선보인 드론(무인기) 공연을 보느라 관람객들이 몰려있다. 세계 2위 드론 업체인 패럿은 음악 소리에 맞춰 작은 드론들이 춤추고 공연하는 모습을 선보여 인기를 끌었다.

근처에 있는 세계 2위 드론(무인기) 업체인 프랑스 '패럿' 전시관에서도 관람객들의 탄성이 터졌다. 작은 드론 10여 대가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 군무(群舞)를 추는 공연을 선보였다. 2014년 창업한 중국 벤처업체 'e항'(eHang)은 아예 사람을 태우고 목적지까지 자율 주행하는 '비행 택시'를 세계 최초로 선보였다.

올해 CES의 핵심 키워드는 '가상현실·드론·전기차'로 요약할 수 있다. 글로벌 업체와 신생 벤처기업들은 일제히 관련 기술을 선보였다. 하지만 이 무대에서 한국 업체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동안 한국은 세계 IT 산업의 선두 주자로 꼽혀 왔다. 올해 CES에도 삼성전자와 LG전자는 TV·냉장고·에어컨 등 전통 가전제품을 전시하는 '센트럴홀'에 수백억원을 들여 가장 큰 부스를 차렸다. 하지만 미국·중국·이스라엘 등 해외 업체들은 이보다 규모는 작아도 미래를 확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치열한 속도전을 펼쳤다. 이런 추세가 이어지면 10~20년 뒤 미래 IT 산업에서는 한국의 설 자리가 없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라스베이거스의 '샌즈 엑스포' 1층 메인 홀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보였다. 이곳에는 세계 각지의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500여 곳이 자기들 신제품·서비스를 선보이는 '유레카 파크(Eureka Park)'를 마련했다. 10㎡(약 3.3평) 남짓한 공간에 책상 하나, 의자 2~3개를 두고 드론, 가상현실 기기 등 다양한 기술과 제품을 선보이는 젊은 기업이 가득했다.

이 중 가장 많은 업체는 주최국인 미국이었다. 둘째로 많은 곳은 뜻밖에도 '구대륙'에 속하는 프랑스였다. 이번 CES에만 프랑스 업체 160여 곳이 '라 프렌치 테크(La French Tech·프랑스 기술)'라는 깃발을 달고 참가했다. 프랑스의 엠마뉴엘 마크론 경제산업디지털장관은 "창업가(entrepreneur)라는 말은 프랑스어임을 잊지 말라"고 말했다.

반면 한국 스타트업은 이곳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전시장 한쪽에 20여 업체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삼성전자의 사내 벤처 프로그램인 'C랩'이 간신히 눈에 띄는 정도였다.

급성장이 예상되는 전기차·무인차 분야 역시 해외 업체들이 주도했다. 미국 포드는 아마존과 손잡고 동그란 원통처럼 생긴 사물인터넷(IoT) 기기로 자동차의 기능과 집 안의 전자 기기를 작동하는 시연을 보였다. 일본 도요타는 자동차가 도로를 달릴 때 GPS(위성 항법 장치) 등으로 지도를 자동 생성하는 기술을 선보였다.

내비게이션(길 안내) 서비스 '김기사'로 유명한 벤처기업 '록앤올'의 박종환 대표는 CES를 둘러본 뒤 "한국 업체들은 기존 가전사업에 집중할 때 해외 업체들은 새로운 먹거리를 발굴하는 모습을 봤다"며 "기업들이 안주하지 말고 미래 산업 발굴에 더 신경써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