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인건비 등 생산원가가 적게 드는 신흥국으로 나가지만 우리는 유럽에 공장을 짓고 유럽의 고급 시장을 공략하는 '역(逆)발상 전략'을 택했어요. 시장점유율(32%) 세계 1위 기업이 된 비결입니다."

터키 이스탄불 시내에서 서북쪽으로 차로 1시간 30분쯤 달려 도착한 효성 스판덱스 공장에서 만난 임규호 공장장의 말이다. 효성은 YKK, 보쉬 지멘스 등 글로벌 기업 230여개가 입주해 있는 테키르다주(州) 체르케즈쾨이 공단에 있는 유일한 한국 기업이다. 축구장 13개 규모(8만7000㎡) 부지에서 이 공장은 1년 12개월 365일 연중무휴로 가동 중이다.

효성이 유럽 시장을 공략하는 전초기지인 터키 스판덱스 공장에서 현지 직원들이 제품 품질을 검사하고 있다. 효성은 이 공장을 설립한 지 2년 만인 2010년 스판덱스 세계시장 점유율 1위 업체가 됐다.

스판덱스는 소량(少量)으로 의류의 품질을 혁신적으로 높여주는 고부가가치 섬유다. 같은 합성 섬유인 폴리에스터의 경우 ㎏당 가격이 3500원인데, 비슷한 굵기의 스판덱스는 두 배 이상 비싼 ㎏당 8000원이다. 지난해 글로벌 경기 침체로 많은 기업이 실적 부진을 겪었지만 효성은 정반대로 사상 처음 영업이익 1조원 돌파를 자신한다. 사양(斜陽)산업인 섬유 부문에서 스판덱스가 최고 효자(孝子)로 한몫한 덕분이다.

합성섬유보다 두 배 이상 비싼 '섬유의 반도체'

'섬유의 반도체'로 불리는 스판덱스는 원래 길이의 5~7배로 늘어나고 원상회복률이 97%에 이를 정도로 신축성이 뛰어나다. 의류에 3~8% 정도만 들어가도 활동성과 구김 방지 등 옷의 기능을 높인다. 예전에는 수영복·스타킹 등에 주로 쓰였으나 최근엔 청바지, 스포츠 의류와 아웃도어 제품에까지 주문이 쏟아진다.

효성 스판덱스 공장 안에 들어가자 거대 냉장고처럼 생긴 수백 대의 기계가 줄지어 있었다. 효성이 독자 기술로 만든 섬유 반죽(폴리머)이 머리카락보다 더 가는 구멍이 촘촘하게 나 있는 방사통을 통과해 나가면 스판덱스 섬유가 나온다. 방앗간에서 가래떡을 뽑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방사통을 통과한 폴리머가 높이 10m에서 떨어지면서 전기 열풍(熱風)에 굳어진 뒤 실타래에 감기면 최종 제품으로 완성된다. 매 초(秒) 폴리머가 총 1만여개의 방사통 구멍을 통과해 직경 30㎛(0.003㎝)인 머리카락 3분의 1 굵기의 스판덱스 섬유로 쉴 틈 없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임 공장장은 "스판덱스 설비는 100% 영업 비밀이기 때문에 상세하게 공개할 수 없지만, 우리 공장에서 생산되는 스판덱스는 경쟁사보다 생산성이 30% 이상 더 뛰어나다"고 말했다.

이렇게 만든 스판덱스 섬유는 '크레오라'라는 효성 브랜드를 달고 터키와 유럽으로 수출된다. 제직(製織)기업들은 '크레오라'를 활용해 천을 가공한 다음 H&M·자라·망고·나이키·아이다스 같은 대중 브랜드와 돌체앤가바나·디젤 등 고급 브랜드에 판다.

완공 2년 만에 세계 시장 1위 등극

중국을 제외한 효성의 첫 해외 공장인 이곳은 '라이크라(Lycra)'라는 선진 브랜드가 장악한 유럽 시장을 공략하는 전진기지다. 이천규 효성 터키 법인장(전무)은 "후발주자인 우리가 유럽 시장에서 선진 업체와 맞짱을 뜨기 위해 현지 공장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특히 원가 경쟁이 치열하고 안정적인 공급 보장 같은 고객과의 신뢰 관계가 필수적인 섬유산업의 특성상 생산 공장을 시장에 최대한 근접해 지을 필요도 있었다.

이정원 효성 상무는 "유럽 현지에 생산기지를 확보할 경우 물류비 절감은 기본이고 바이어·공급업체들의 까다로운 요구 사항을 제때 반영할 수 있는 게 큰 매력이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EU와 관세동맹을 맺어 무(無)관세 지역인 데다 섬유산업 경쟁력이 높은 터키가 공장 건설지로 낙점됐다. 효성 터키 공장의 반경 30㎞ 이내에 고객 회사가 100개 넘게 있는 것도 양호한 조건이었다. 터키는 한국 기업에 낯선 이슬람 국가이다. 그러다 보니 근로 문화 등이 상반돼 초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현지 직원들을 주기적으로 한국 구미 공장으로 보내는 등 적극적인 소통과 교육 노력을 쏟아 기업 문화가 안정됐다.

이천규 법인장은 "외상 거래가 관행인 터키 기업들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지만 고객을 계속 설득해 지금은 대부분 현금 거래로 정착시켰다"고 말했다. 2008년 공장을 완공한 지 2년 만인 2010년부터 효성은 스판덱스 부문에서 세계 시장점유율 1위가 됐다.

조현준 효성 섬유부문 사장은 "스판덱스 현지 생산 물량을 꾸준히 늘려 2020년엔 세계 시장점유율 40%를 돌파할 계획"이라며 "터키 공장에서 벌어들인 수익으로 국내 공장 시설 투자비와 연구개발비를 충당하고 신규 일자리도 만들어 내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