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삼성전자 수원캠퍼스 내 디지털연구소 건물엔 요즘 텅 빈 방들이 많다. 지상 37층에 8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건물에 입주해 있던 DMC연구소가 사실상 해체됐기 때문이다. 인력 구조조정의 영향으로 전체 연구원 2000여명 중 1500명이 다른 사업부로 배치되거나 퇴사하고 남은 500명도 서울 우면동 R&D캠퍼스 등으로 옮긴 것이다. 한 관계자는 "각 연구 부서와 사업부도 구조조정 여파로 감원해 이 건물을 채우기 어렵다"고 했다.

삼성전자에선 또 올 하반기부터 50세 안팎의 고참 부장들을 상대로 퇴사 권고를 하고 있다. 모 사업부의 A 부장은 "회사 측에서 수시로 면담을 통해 '내년 경영 상황이 올해보다 힘들 것'이라며 은근히 퇴사를 압박해 고민이 많다"고 말했다. 올해 총매출 200조원에 20조원 정도의 영업이익을 낸 흑자 기업 삼성전자가 '선제 구조조정'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상무 승진 1년 차도 옷 벗어

올 들어 3분기까지 4조원대 손실을 기록한 대우조선해양은 지난 10월 부장급 300명 이상을 한꺼번에 내보냈다. 임원도 20명 넘게 감축했다. 그 결과 서울 중구 다동에 있는 대우조선해양 본사 13층 임원실은 대부분 텅 비어 있다. 올해 1조원 넘는 적자가 예상되는 현대중공업도 올해 초 과장급 이상 사무직 등 1200여명을 희망퇴직 방식으로 정리했다. 현대중공업·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 3대 조선업체에서 올해 일자리를 잃은 사무직만 2000명 정도다.

기업마다 실적 부진에 시달리면서 임원 자리도 급감하고 있다. 5대 그룹의 한 임원은 지난달 정기 인사에서 상무 승진 1년 만에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 한 대기업 임원은 "예전에는 임원 자리에 오르면 최소 3년은 보장해주는 게 불문율(不文律)이었으나 지금은 꿈도 못 꾼다"고 말했다. 지난달부터 이달 11일까지 인사를 단행한 10대 그룹에서 퇴사한 임원은 삼성 500여명, 현대중공업 100여명을 포함해 1000명에 달한다.

1990년대 말 40·50대에 집중됐던 희망퇴직 대상자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후 30대로 내려온 데 이어 이젠 20대도 희망퇴직 대상이 됐다. 두산인프라코어에 근무하는 입사 5년 차 K(31) 대리는 "입사 2~3년 미만 사원도 희망퇴직 신청서를 내라는 얘기가 들린다"며 "회사에선 희망퇴직이라고 하지만 상당수 직원은 정리 해고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이달부터 삼성그룹 역사상 전례 없는 '무급 순환 휴직'에 돌입한 삼성엔지니어링의 한 과장급 직원은 "입사 동기들 사이에 한 달 동안 쉬면서 가족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라도 뛰어야 한다'는 하소연이 많다"고 말했다.

IMF 외환 위기 이후 17년여 만의 최악의 감원 사태는 가계소득 감소 위험으로 직결되고 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경제 현장의 기업발(發) 위기가 가계 문턱을 넘어 급속도로 전이되고 있다"며 "이런 상태가 중견·중소기업으로 본격 확산되면 서민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력서만 쌓이고 재취업 극소수"

문제는 내년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이번 주 국내 400개 기업을 상대로 내년도 경영 계획을 조사한 결과 올해가 20일 남짓 남은 시점에서 투자와 채용 계획을 확정하지 못했다고 응답한 기업이 각각 30%를 넘었다. '올해보다 채용을 늘리겠다'고 답한 기업은 13%에 그쳤다. 반대로 '현재 비상(非常) 경영 체제를 가동 중이거나 앞으로 고려하고 있다'고 밝힌 기업은 전체 응답 기업의 50%를 넘었다.

대기업을 그만둔 사람은 폭발적으로 늘고 있지만 재취업은 불가능에 가깝다. 공급(구직자)은 많은데 수요(일자리)가 턱없이 부족한 탓이다. 이 때문에 재취업을 알선하는 헤드헌팅 회사에 이력서는 쌓여도 재취업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헤드헌팅 기업 '패스파인더'의 김재호 대표는 "올 10월까지만 해도 1주일에 1통 정도 이력서가 들어 왔으나 지난달부터는 하루에 5~6통씩 이력서가 들어오고 있다"며 "경력 임직원을 뽑겠다는 곳이 드물어 재취업 성공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