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低)유가가 축복인 시대는 지났다. 아니 재앙일 수도 있다.”

정유 업계가 저유가 공포에 떨고 있다. 최근 원유 매장량 기준 세계 4위인 이란이 원유·가스 프로젝트에 대한 대대적인 해외 투자 유치에 나서면서 국제 유가(현재 40달러 수준)가 20달러 선까지 폭락할 것이란 ‘불길한 전망’이 나오고 있다.

유가 하락 전망에 무게가 실리면서 정유업계의 표정은 굳어지고 있다.

“과거 정유업은 안정적인 매출과 수익이 보장되는 사업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도박 수준의 리스크를 항상 안고 가야 하는 산업이 됐다"는 푸념이 나오고 있다.

특히 계절적인 성수기인 4분기 실적이 추락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한 에너지 업계 전문가는 “통상적으로 4분기는 계절적 성수기다. 하지만 유가의 불확실성 때문에 이익이 나기 보단 이익 추락을 걱정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GS칼텍스 관계자는 “유가가 떨어진 만큼 정제 마진이 올라가지는 않는 상황이다. 요즘 같이 유가가 확 올랐다가 확 떨어지는 상황에선 정유사들이 손실을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SK이노베이션 관계자도 “(정유사 대부분이) 업황 보다는 환율과 유가 변동의 유불리를 따져야 하는 상황”이라며 “실적 개선을 위해서는 본업인 정제 사업 보다 비정유 부문이 주력해야 한다는 말도 나온다”고 말했다.

저유가 시대가 도래하면 정유·화학·조선·해운 등 가뜩이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주력 산업들이 줄줄이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높다. 정유 회사들은 당장 제품 단가 하락으로 내년 매출이 급격히 쪼그라들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최근 중국의 물량 공세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화학 기업들도 걱정스런 표정이다. 한 화학업계 관계자는 “중국의 공급 과잉으로 고전하는 상황에서 유가 하락으로 제품 가격 마저 떨어지면 매출과 이익이 함께 추락하는 상황이 올 것"이라며 “추가적인 유가 하락은 화학 업계에게 또 다른 악몽"이라고 말했다.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 조선소들도 좌불안석이다. 저유가 여파로 기존 수주 물량의 납기가 줄줄이 늦춰지고 주문 취소가 잇따르는 상황에서 유가가 더 떨어질 경우 어려움이 가중될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 관계사는 “유가가 추락하면 한 건 당 1조원 대에 달하는 석유 시추 사업 장비 인수가 지연되거나 아예 취소될 가능성도 높다”며 “해외 선주들의 찾아 다니며 빨리 인수해 달라고 사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출 전선에도 비상이 걸렸다. 석유제품은 반도체에 이은 제 2위의 수출 품목이다. 유가 하락으로 석유제품 단가가 떨어지면 당장 내년 수출 규모도 추락한다.

최근 정유 업계 전반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나라는 이란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지난 11월 29일(현지시간) “이란 정부가 수도인 테헤란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자국내 70개 원유·천연가스 프로젝트에 투자하라는 내용을 담은 에너지 산업 컨퍼런스를 열었다”고 보도했다. 현재 이란의 투자 유치 목표는 300억 달러(74조 8240억원)로 알려져 있다.

미국 등과의 핵 협상 타결로 내년부터 경제 제재가 풀리는 이란은 올해 10월 기준 하루 270만 배럴 수준인 원유 생산 능력을 2020년까지 570만 배럴로 늘릴 계획이다.

이란의 원유 증산이 가시화 되면 정유 업계는 ‘치킨 게임’으로 끌려 들어갈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원유 수요는 줄어들 전망인데, 공급이 크게 늘면 정유업계는 무지막지한 가격 경쟁으로 끌려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이미 국제 유가는 배럴 당 40달러 아래로 내려갔다. 1년 6개월 전보다 50% 이상 폭락했다.

세계 에너지 업계 전문가들은 유가가 20달러 선으로 추락할 가능성을 내놓고 있다. 1년 전인 2014년 배럴 당 70~80달러를 오가던 유가가 ‘반의 반토막’ 날 것이란 예상이다.

미국 백악관 경제고문인 로버트 맥널리 컨설턴트는 “국제적인 석유 공급과잉 현상이 개선될 여지가 없다. 이란의 움직임은 OPEC를 압박하고 있다. 원유 시장엔 검은 먹구름이 형성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4일 예정된 OPEC 회의에서 감산 합의에 실패하고, 가격 경쟁에 돌입할 경우 유가 하락은 불가피하다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지난해 11월 28일에 열린 OPEC 정례회의에서도 회원국들이 감산 합의에 실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서부텍사스 중질유(WTI) 가격은 하루 만에 배럴 당 74.67달러에서 68.38달러로 8.6% 급락했다.

손지우 SK증권 연구원은 “국제 유가(油價) 하락은 우리 경제에 호재라는 생각을 많이 하지만, 저유가가 지속되면 유가와 매출액이 연동되는 정유 산업은 매출 감소, 이익 감소 등 고통을 받는다. 비용 감축과 투자 감소에 이어 대량 실업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손 연구원은 “4일 OPEC 정례 회의에서 감산 발표가 있으면 유가 상승 가능성은 있지만, 현실화되기 어렵다”며 “이란의 증산, 미국 금리 인상(달러 강세) 가능성 등을 고려할 때 유가 추가 하락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참고기사
"유가 30달러대, 기름 값 왜 찔금 내리나"...가격의 60%가 세금, "정부만 배불리는 구조"<2015.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