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억 인구의 거대한 중국 시장을 우리나라와 연결하는 한·중 FTA(자유무역협정) 비준안이 30일 국회를 통과했다. 하지만 정부와 여야가 FTA로 피해를 보는 농어촌을 지원하는 용도로 기업들로부터 매년 1000억원씩 10년간 1조원의 '농어업 상생기금'(가칭)을 기부금으로 걷는 방안에 합의해 논란이 되고 있다. 재계는 "농어업 상생기금은 당초 야당이 주장해온 '무역이익공유제'의 변형된 형태로 사실상 다를 게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무역이익공유제란 FTA로 이익을 보는 기업의 이윤 가운데 일부를 강제성 있는 부담금으로 징수하는 제도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악법"이란 비판을 받았다. 정부와 정치권은 기업들의 반발을 의식해 농어업 상생기금을 자발적인 기부금 형태로 걷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한 재계 관계자는 "기부금을 내지 않으면 여론 재판과 각종 규제를 앞세워 기업들을 압박할 게 불 보듯 뻔하다"면서 "기업들 팔을 비틀어 삥 뜯어가는 준조세나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여야 지도부가 30일 오후 국회에서 회동을 갖고 한·중 FTA(자유무역협정) 비준동의안을 이날 열리는 본회의에서 처리하기로 합의한 뒤 서로 악수하고 있다. 왼쪽부터 새누리당 원유철 원내대표와 김무성 대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와 이종걸 원내대표.

정부는 "민간 기업, 공기업, 농·수협 등의 자발적 기부금을 재원으로 농어촌 상생 협력 사업에 쓰겠다"면서 애써 '기부'임을 강조하고 있다. 정부는 '기부금'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상생기금을 낸 기업에 대해 기부금 손금(비용) 처리와 세액공제, 동반성장지수 가점 부여 같은 인센티브를 주기로 했다.

하지만 재계는 "비상식적인 합의로 뒤통수를 맞게 됐다"며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한·중 FTA가 시행되면 무역 경쟁력이 강화될 것이라는 기대가 컸지만 이대로라면 오히려 기업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며 "정치권이 경제계 입장은 전혀 들어보지도 않고 독소 조항을 일방적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재계는 상생기금의 조성 방식에도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어느 업종, 어느 기업이 한·중 FTA 시행으로 이익을 보게 될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누가 '자발적으로' 기금을 내놓겠느냐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재계 관계자는 "청년들 일자리 창출을 위해 정부가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청년희망펀드의 경우 재계가 서로 눈치를 보다 삼성이 250억원을 내놓자 현대차가 200억원, SK와 LG가 각 100억원 등 그룹 순위에 맞춰 마지못해 기부금을 냈다"면서 "기부금을 내라고 정부가 요청할 때 안 내고 버틸 재간이 있는 기업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석유화학업계 관계자는 "한·중 FTA가 시행되면 국내로 들어오는 중국산 저가 수입품은 관세 철폐의 혜택을 받는 반면 중국으로 나가는 국산 고부가 수출품은 관세 철폐가 유예돼 오히려 손해 볼 여지가 크다"며 "꼼꼼하게 따져 보면 손해를 보는데 기금까지 내야 한다면 부담이 이중(二重)으로 늘어나게 된다"고 말했다.

통상 전문가들은 "FTA를 체결한 전 세계 국가 가운데 기업들의 기부금을 걷어 피해 분야 보상 재원으로 쓰는 곳은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 전문가들이 상생기금의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한·중 FTA는 역대 FTA 가운데 농산품 개방 정도가 가장 약한데도 정부와 정치권이 내년 총선을 의식해 선심성 정책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한·중 FTA를 통해 우리나라가 20년 내에 관세 철폐를 하기로 한 대상은 전체 품목 수 기준으로 92%다. 하지만 민감 분야인 농수산물 개방 수준은 품목 수 기준 70%로 낮다. 수입액 기준으로도 농수산물 개방 수준은 40%로 역대 FTA 최저 규모다. 한·중 FTA 체결로 인한 농수산물 생산 감소액(정부 추산)은 20년간 약 3620억원으로 한·미 FTA(15년간 12조6600억원)나 한·EU FTA(15년간 약 2조6000억원)보다 훨씬 작다. 그동안 정부가 추진해온 각종 FTA 협상에 참여한 정인교 인하대 교수는 "쇠고기 등 농산물 품목의 90% 이상을 개방한 한·미 FTA와 달리 한·중 FTA는 농수산물에 대한 개방 정도가 극히 낮다"면서 "정부가 농어업 상생기금까지 만들어 지원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둘째, 상생기금이 앞으로 다른 FTA를 체결할 때마다 농어업 지원의 나쁜 선례(先例)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장은 "앞으로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나 중국을 축으로 한 RCEP(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에 참여할 때 다른 명목의 기금이 생겨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말했다.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나쁜 선례를 남길 바에야 차라리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으면 하는 생각까지 든다"고 했다.

셋째, 정부 재정이 전혀 안 들어가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1조원의 기부금에 대한 공제 혜택을 감안할 경우 손비 인정으로 인한 법인세 감면(최대 2200억원)과 세액공제 혜택(1조원의 7%인 700억원)을 합쳐 최대 2900억원의 정부 재정이 투입될 수 있다. 또 정부와 여야는 합의문에 "만일 자발적 기금 조성액이 연간 목표에 미달할 경우 정부는 그 부족분을 충당하도록 필요한 조치를 한다"고 명시했다. 기부금이 모자랄 경우 정부가 책임진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김학도 산업통상자원부 통상협력실장은 이날 정부 합동 브리핑에서 "(이미 각종 기부금을 내고 있는) 기업들이 매년 추가적으로 1000억원을 내는 것은 부담스러운 상황은 아니다"라며 "기업에 대해서 할당을 하지 않고 자발적인 기부를 유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기부금이 목표에 미달하더라도 예산 조치나 추가적인 재정 부담은 없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