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 전까지 한국 썰매는 국제무대에서 웃음거리였다. 2010년만 해도 돈이 없어 외국 팀이 버린 썰매를 수리해 타거나 빌려서 경기에 출전했다. 기량 미달로 대회 중 썰매가 뒤집혀 기록조차 나오지 않는 건 다반사였다. 이렇게 찬밥 신세였던 한국이 봅슬레이의 본고장 유럽에서 '대형 사고'를 치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29일(한국 시각) 독일 알텐베르크의 봅슬레이 경기장. 한국의 원윤종(30), 서영우(24·이상 경기도연맹)는 2015~2016시즌 국제봅슬레이스켈레톤연맹(IBSF) 월드컵 1차 대회 남자 2인승에서 1·2차 시기 합계 1분53초02를 기록하며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2위 라트비아(1분53초00)와 불과 0.02초 차이였다. 1위는 독일(1분52초56)이 차지했다. 한국이 올림픽·세계선수권 다음으로 권위가 높은 국제 대회인 월드컵에서 메달을 딴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 감격을 평창까지’. 원윤종(왼쪽)과 서영우가 29일(한국 시각) 독일 IBSF(국제봅슬레이스켈레톤연맹) 월드컵 1차 대회 봅슬레이 남자 2인승에서 한국 봅슬레이 사상 첫 월드컵 동메달을 따낸 뒤 환호하고 있다.

원윤종과 서영우는 수천억원 규모의 썰매 빙상장을 갖춘 유럽·북미 지역의 선수들과 비교하면 요즘 유행하는 말로 '흙수저(집안 배경이 좋은 금수저에 대비되는 말)'에 가깝다. 한국에는 썰매 전용 경기장이 하나도 없다. 지난 2010년 평창에 '스타트 훈련장'이 생기기 전까진 아스팔트 바닥에서 바퀴 달린 썰매를 밀며 훈련했다.

유소년 시절부터 썰매를 타는 외국 선수들과 달리 원윤종과 서영우는 5년 전까진 성결대 체육교육과에 다니며 교사를 꿈꾸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미래를 고민하던 이들은 어느 날 학교에 붙은 '국가대표 선발전' 포스터를 보고 덜컥 지원해 합격했다. 열심히만 하면 올림픽에도 나갈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이들은 2010년 밴쿠버올림픽 봅슬레이 대표였던 강광배 현 한국체대 교수의 지도를 받았다. 머리 회전이 빠른 원윤종은 '파일럿'(앞에 앉아 썰매를 조종), 육상 단거리 선수로 활동해 하체가 튼튼한 서영우는 '브레이크맨'(스타트 때 썰매를 미는 역할)을 맡았다.

원윤종과 서영우는 남다른 열정으로 '무모한 도전'을 '위대한 도전'으로 바꿔나갔다. 원윤종은 2011~2012시즌 자격 미달로 월드컵에 출전도 못 할 만큼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1년도 안 된 초보가 10년 이상 썰매를 탄 외국 선수와 경쟁하는 건 무리였다. 하지만 '이 길이 아니면 안 된다'는 간절함이 그를 붙잡았다. 매일 10시간의 강훈련을 견뎠다. 유럽과 북미의 10여 개 이상 경기장을 모두 달려보고, 경쟁 팀을 찾아가 코스 운영 방법을 묻기도 했다.

군 복무 시절 77㎏이었던 원윤종은 썰매에 가속도를 올리기 위해 피나는 노력으로 몸을 불렸다. 하루 8끼, 매일 밥 15그릇을 해치웠다. 야식으로 라면 3봉지는 기본이었다. 과식으로 토하면 다시 먹기를 반복하며 100㎏대까지 체중을 늘렸다. 원윤종은 첫해 45위에 그쳤던 랭킹을 지난 시즌 10위까지 끌어올리며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보 페리아니(이탈리아) IBSF 회장은 "이런 추세라면 한국 썰매가 2018 평창올림픽에서 메달을 1개 이상 따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원윤종과 서영우는 최근엔 무조건 몸집을 불리던 방식 대신 스타트 파워를 늘리고, 코너링을 정교하게 다듬으며 '양'보다 '질'에 집중하고 있다. 지난 4월부터 반년 가까이 매일 윗몸일으키기 1000개와 2시간씩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근력을 늘린 덕분에 원윤종(182㎝·108㎏)과 서영우(180㎝·102㎏)는 스타트 기록을 1년 만에 0.1초 당겼다. 봅슬레이는 0.01초 차이로 승패가 갈리는 종목이다.

훈련 환경도 좋아지고 있다. 봅슬레이 대표팀은 1년에 120일가량 해외에서 훈련하고 대회에 출전한다. 대우인터내셔널, 아디다스, KB금융, 현대자동차 등 든든한 후원 업체도 갖게 됐다. 내년 2월 평창에 전용 경기장이 완공되면 한국 대표팀이 가장 먼저 달리게 된다. 강광배 교수는 "썰매는 트랙 적응이 중요하기 때문에 개최국 이점이 크다"며 "평창 대회에서 뜻밖의 결과를 볼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