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때나 오세요. 하루종일 음표 하나하나, 악보 한 구절 한 구절 따지느라 연습실에서 꼼짝도 안 할 테니까요."(양성원) 그래서 지난 24일 오후 서울 신촌 연세대 음대 연습실을 찾았다. 그랜드피아노가 꽉 들어찬 두 평 남짓한 방 안에서 중년 남자 둘이 쉴 새 없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대화의 수단은 말(言)이 아닌 악기. 두 사람은 첼로와 피아노를 포갰다가 아쉬운 점이 있으면 잠시 멈추고 대화를 나눴다. 간간이 웃음소리가 배어들었다.

첼리스트 양성원(48·연세대 교수)이 1~2일 이틀간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베토벤의 '피아노와 첼로를 위한 소나타와 변주곡' 전곡(全曲)을 연주한다. 이탈리아 피아니스트이자 음악 지기(知己)인 엔리코 파체(Pace·48)가 함께다. 지난 3월부터 펼쳐온 실내악 연주 시리즈를 마무리하는 자리. 지난해 브람스와 슈만 음반을 녹음하는 등 오랜 기간 호흡을 맞춰온 동갑내기 음악가들은 "몰아서 연습해야 몰입이 돼서 더 좋은 음악이 나온다"고 했다.

지난 24일 서울 연세대 음대에서 만난 첼리스트 양성원(오른쪽)과 피아니스트 엔리코 파체. 양성원은 “엔리코와 작업하면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운 음악을 다시 만드는 듯한 즐거움에 빠진다”고 말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빛과 토질에서 나오는 영양분이 합쳐져서 가을에 사과가 수확되잖아요. 음악도 마찬가지예요. 사람들은 아름다운 꽃을 보고 열광하지만 저희의 작업은 거친 뿌리를 이해해야만 가능한 것. 이 뿌리를 충분히 파고들어 저희 것으로 소화해야만 다른 색깔의 꽃을 피울 수 있어요."(양)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파리를 토대로 연주 활동을 했던 파체는 지난 13일 파리 테러 소식을 듣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했다. "이런 비극 앞에 음악가들이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실내악이 실마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어요. 지휘자가 따로 없이 연주자 서너 명만 모여 작은 규모로 연주하는 실내악은 '듣기'가 핵심입니다. 남의 연주를 잘 들으면서 자기 연주를 알맞게 보태야만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 수 있어요. 세상도 그런 거 아닌가요."

1987년 양성원이 미국 인디애나대로 유학 가서 처음 연주한 게 베토벤 첼로 소나타 3번이었다. 스승 야노스 슈타커가 '첼리스트라면 반드시 베토벤 소나타부터 연주해야 한다'고 했다. 당시 열아홉이던 그는 음악적 구조가 어찌나 어렵고 힘들던지 연주하는 내내 캄캄한 터널을 지나가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지천명을 앞두고 그가 보는 베토벤은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나무처럼 이상을 추구하고 포기하지 않았던 인간' '비극적 드라마를 지니고 있지만 누구보다 부드럽고 인간미가 넘쳤던 작곡가'다. 바흐와 베토벤, 슈베르트를 녹음한 양성원이 다음번 꿈꾸는 작곡가는 메시앙. 내년 한·불 수교 130주년을 맞아 "19세기 한국에서 순교한 프랑스 신부들이 활동한 명동성당 같은 곳에서 메시앙의 '시간의 종말을 위한 사중주'를 연주하고 녹음하고 싶다"고 했다.

▷2015 세종 체임버 시리즈 Part IV=12월 1~2일 오후 8시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 (02)399-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