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주를 못 해 지금 잘리는 것보다, 3년이라도 더 버틴 뒤에 잘리는 게 낫지 않겠어요."

지난주 한 대형 건설사 최고재무책임자(CFO)를 만났다. 건설업계 사정이 어떤지를 묻고 답하길 몇 차례. 화제는 이내 최근 다시 불거진 해외 저가 수주로 옮겨갔다. 저가 수주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대답은 뜻밖의 반문으로 돌아왔다. “지금 잘리는 게 좋겠습니까, 아니면 3년 후에 잘리는게 낫겠습니까?”

알 듯 모를 듯한 반문에 갸우뚱했지만 금세 고개가 끄덕여졌다. 수주 실적이 없으면 당장 잘리지만, 어떻게든 수주 실적이라도 올려놓으면 최소한 그 사업이 마무리되는 몇 년 동안은 버틸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사장조차 실적으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조직에서, 어찌됐건 수주는 곧 회사를 이끄는 최고경영자(CEO)의 최고 덕목이자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인 셈이다.

그래서였을까, 사실 언제부턴가 건설사 실적발표 때만 되면 조마조마했다. 또 어디선가 업계를 뒤흔들 곡소리 나는 어닝쇼크(기대 이하의 실적 하락)가 터져 나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이다. 2013년 삼성엔지니어링이 1조원이 넘는 영업손실을 기록한 뒤 여러 대형 건설사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잇따라 해외 손실을 털어놓으며 해외 부실 수주의 ‘불편한 민낯’을 드러낸 탓이 크다.

안타깝지만, 이런 불안감은 한동안 더 겪어야 할 것 같다. 해외 저가 부실 수주의 늪에 빠진 대형 건설사들이 얼추 부실을 털어냈다고는 하지만, 아직 잠재 부실 여파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건설·증권업계는 아직 남은 해외 부실이 최대 12조원대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진행 중인 공사에서 아직 2조원대의 부실이 남은 것으로 보인다. 삼성엔지니어링과 GS건설(006360), 대림산업, 삼성물산(028260), 대우건설(047040)등 주요 건설사들은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 등에서 수주한 문제 사업장 공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문제 사업장에서 앞으로 얼마의 손실이 날지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지만, 과거 업계의 충당금 설정 비율과 수주 잔액을 고려할 때, 문제 사업지 부실 규모는 2조~2조5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건설업체들이 공사비를 쓰고도 받지 못한 미청구 공사금액도 잠재 부실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미청구 공사금액은 끝까지 받지 못하면 손실로 처리해야 한다. 삼성물산, 삼성엔지니어링, GS건설, 대우건설, 대림산업 등 5개 주요 업체의 9월 말 기준 미청구 공사금액만 10조원이 넘는다.

여기까진 이미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 없다고 치자. 이들 공사가 마무리되면 앞으로 수주하는 해외 공사에선 저가 수주에 따른 부실 우려를 지울 수 있을까.

냉정히 말하면, 저가·부실 수주의 관행은 쉽게 사라지기 어려울 것 같다. 실무급 직원은 물론 CEO까지 당장 올해 실적이 한 해 평가를 좌우한다. 실적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몇 년 뒤, 아니 당장 내년 걱정부터 할 리 없다.

저가 수주의 책임을 지는 CEO가 없다는 것도 부실 저가 수주의 ‘망령’이 계속되는 원인이다. 저가 수주의 손실은 당장 드러나지 않고 잠복해 있다가 공사가 어느 정도 진행된 뒤에야 나타난다. 그래서 보통 저가 수주의 책임은 다음 CEO로 전가된다.

건설사가 생존하려면 수주는 필수다. 살아남으려는 공격적인 수주를 탓할 수만도 없다. 제안 하나 하자면, 모든 권리에 책임이 따르듯, 해외 수주도 오너나 CEO가 책임을 지면 좋겠다. ‘수주실명제’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이다.

저가 수주로 회사 경영을 위태롭게 한 CEO가 다른 계열사 CEO나 고문 등으로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며 고액 연봉을 챙기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이제 더는 보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