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성이 가상현실(VR) 헤드셋을 쓰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이 남성은 바닥에 그려진 커다란 원을 따라 움직이면서 고개를 연신 위아래로 움직였다. 마치 거대한 구조물 주위를 돌면서 그 구조물을 구경하고 있는 듯했다. 남성 다음으로 출발한 여성도 앞사람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흥미롭다는 듯 스마트폰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한 남성이 26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2015 창조경제박람회’ 전시장을 방문해 가상현실 헤드셋을 착용하고 석굴암 내부를 감상하고 있다.

지난 26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개최된 ‘2015 창조경제박람회’의 한 전시 부스 풍경이다. 이 부스를 마련한 서울대 차세대융합기술연구원 인터랙티브미디어아트기술연구센터는 VR 헤드셋 안에 경북 경주 석굴암(국보 제24호)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VR 기기를 쓴 사람의 눈앞에는 신라 시대에 탄생한 웅장한 걸작품이 펼쳐진다.

체험에 임한 남성과 여성은 석굴암 안쪽 주실(主室) 한 가운데 놓인 본존여래좌상을 구경하며 걷느라 고개를 계속 위아래로 움직였던 것이다. 이 센터 소속 안광석 연구원은 “실제 석굴암 내부에는 유리 칸막이가 설치돼 있어 방문객들이 안쪽 조각상까지 접근할 수 없다”면서 “VR 기술을 활용하면 석굴암 내부 구석구석을 살펴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 세계 주요 정보기술(IT) 기업들이 앞다퉈 투자하고 있는 VR의 인기는 이번 창조경제박람회 현장에서도 확인됐다. 전시장 곳곳에서 방문객들은 VR 헤드셋을 착용하고 무엇인가를 체험하고 있었다.

올해 처음으로 창조경제박람회에 참가한 글로벌 IT 기업 페이스북과 구글도 VR을 주제로 부스를 꾸몄다. 페이스북은 지난해 3월 20억달러(약 2조3000억원)를 주고 인수한 VR 기술업체 오큘러스의 VR 헤드셋인 ‘오큘러스 리프트’를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부스를 마련했다.

여성 참가자가 구글이 개발한 보급형 가상현실 기기 ‘카트보드’를 사용하고 있다.

지난 2012년 8월 창업한 오큘러스는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해 화제를 모았다. 오큘러스 리프트에 적용된 ‘포지셔널 트래킹’ 기술은 사용자가 움직이는 방향을 즉각적으로 감지해 실감나는 영상을 제공한다.

페이스북 부스에서 만난 고등학생 이준호(18)군은 “분명 의자에 앉아서 VR 헤드셋 체험을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내가 걸어가고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재미있었다”고 말했다.

구글은 딱딱한 판지(板紙)로 만들어진 보급형 VR 기기 ‘구글 카드보드’를 부스 전면에 전시하고, 방문객들이 직접 사용해볼 수 있도록 안내했다. 카드보드는 판지와 렌즈, 고무줄 만으로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VR 기기다. 상자를 조립하듯 카드보드를 만든 다음 스마트폰을 연결하기만 하면 누구나 입체 영상을 볼 수 있다.

이재현 구글코리아 전략기획본부장은 “시중에 판매 중인 10만원대 VR 기기들과 달리 카드보드는 5000원 정도면 충분히 만들 수 있다”면서 “저렴한 VR 기기가 대중화를 촉진하고, 자연스레 관련 소프트웨어 개발 생태계도 활기를 띠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15 창조경제박람회 전시장에 방문한 여성이 가상현실 기기를 이용한 재난 안전교육 프로그램인 ‘슈퍼 서바이버’를 체험하고 있다. 모니터에 나타난 화면이 이용자가 가상현실 기기를 통해 보고 있는 장면이다.

미국에서는 이미 카드보드가 대중의 생활 속에 침투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이달 초 내전으로 고향을 잃은 아프리카와 중동의 아동 난민 소식을 VR 영상으로 제작해 보도했다. 이 신문 독자들은 카드보드를 통해 난민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VR 기술을 활용해 각종 재난 상황에 대비한 훈련을 하는 경우도 있다. 경기도재난안전본부는 학교나 기업을 대상으로 가상 재난 안전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올해 말까지 총 9억5000만원을 투입해 시뮬레이션 프로그램 ‘재난 탈출 119’를 개발 중이다. 사용자는 아파트 화재, 노래방 화재, 지하철 사고, 자전거 사고, 전염병 확산 등 총 5가지 상황 중 하나를 선택한 다음 5분 안에 탈출하거나 프로그램이 제시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번 창조경제박람회에서 넥스브레인이 선보인 ‘슈퍼 서바이버’도 재난 탈출 119와 비슷한 VR 재난 안전교육 프로그램이다. 함재훈 넥스브레인 기업부설연구소장은 “사용자는 VR 헤드셋을 착용한 뒤 화재가 발생한 아파트에서 빠져나오는 훈련을 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대만 시장조사업체 트랜드포스에 따르면 전 세계 VR 기기 시장 규모는 2016년 1400만대에서 2020년 3800만대로 2.5배 이상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