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브룩스 지음ㅣ김희정 옮김ㅣ부키ㅣ496쪽ㅣ1만6500원

“겸손을 스스로 배우지 않으면, 신은 모욕과 굴욕을 안김으로써 그것을 가르친다. 한 사람을 위대하게 만들기 위함이다. 필요한 일에 순응함으로써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겸손과 내적 진실성에 가까이 다가서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

미국의 최장수 노동부 장관였던 프랜시스 퍼킨스가 쓴 평전 ‘내가 아는 루스벨트’에 나오는 대목이다.

요즘이야 인생의 목표라면 단연 부와 유명세를 앞세우는 분위기다. 젊은이들은 자수성가한 갑부나 사업가를 인생 모델로 삼는다. 이런 특출난 성공을 위해선 무엇보다 자신의 능력을 믿고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는 조언이 넘쳐난다. 그 결과 자연스럽게 ‘나는 충분히 특별하고 훌륭한 존재’라는 인식이 어디에나 퍼져있다. 그것을 오만이라는 말로 경계하기보다 자존심 혹은 자긍심이라는 단어로 예찬한다.

심리학에는 ‘자아도취 평가’라는 게 있다. 평가 문항에는 ‘나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싶다’ ‘나는 특별하기 때문에 기회가 되면 나의 장점을 뽐낸다’ ‘누군가 내 일대기를 써야 한다’ 같은 예시 명제가 들어있다. 이런 문제로 자아도취의 정도를 측정한 결과, 최근 20년 사이 젊은층의 중간값이 30% 증가했다고 저자는 소개한다.

유명세를 얻고 싶어하는 욕구도 급증했다. 1976년 미국인에게 인생 목표 16가지를 제시하고 어느 것이 우선하는가 물었더니 유명세는 15위에 불과했다. 30년이 지난 2007년, 젊은층의 51%는 유명세를 첫 순위에 꼽았다.

지금 이대로 괜찮은 걸까. 저자는 묻는다. 뉴욕타임스(NYT)의 인기 칼럼니스트이자 ‘보보스’ ‘사회적 동물’ 같은 베스트셀러를 썼던 저자는 이제 자신을 내세우는 ‘빅 미(big me)’ 대신 결함과 수양을 필요로 하는 ‘리틀 미(little me)’에 주목하자고 말한다.

외형적인 성공(成功)이 아닌 내면의 성장(成長)을 추구하자는 이야기다. 이를 위해 과거의 사례 인물들의 삶을 되짚는다. 앞서 소개한 퍼킨스를 비롯해 2차 대전 승리의 주역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마셜 플랜’의 입안자 조지 마셜, 사회운동가 도러시 데이, 인권운동가 필립 랜돌프와 베이어드 러스틴, 작가 조지 엘리엇과 새뮤얼 존슨, 성인 아우구스티누스까지 9명이다. 이들의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삶의 궤적을 치밀하게 추적한다.

“좋은 예만큼 설득력 있는 것은 없다.…마음으로 감명을 받았을 때 도덕적 향상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회운동가였던 퍼킨스를 노동부 장관으로 발탁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공황에서 미국 경제를 부활시킨 주역이다. 그가 독보적으로 현명한 인물이었기 때문일까? 저자는 그의 곁에 든든한 조력자들이 많았음을 상기시킨다. 금융, 경제, 외교, 행정 분야의 전문가들을 등용한 덕분에 루스벨트는 ‘뉴딜 정책’ 같은 굵직한 구상들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퍼킨스는 그런 루스벨트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약간 거만한 사람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소아마비와 투병한 후 정계로 복귀한 그의 모습에서 변화를 감지했다. 후유증 때문에 거동이 불편해진 루스벨트는 주변의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부끄러워하거나 예민하게 굴지 않았다. 겸손하게 도움을 청했다. 병이 루즈벨트의 인격을 가다듬는 계기가 됐다고 퍼킨스는 짐작했다.

퍼킨스는 당시로서는 전례가 없는 여성 장관으로 발탁돼, 루스벨트 재임 기간 내내 자리를 지켰다. 미국 최초의 최저임금법과 시간외근무법을 만들었다. 뉴딜 정책으로 시행된 대규모 공공근로사업도 그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뛰어난 행정가나 입법가의 자질을 타고난 것은 아니었다. 다양한 과외 활동을 할 정도로 풍족한 유년기를 보내지도 못했다.

그의 삶은 끊임없는 노력과 학습, 일련의 투쟁으로 점철됐다. 퍼킨스는 학칙이 엄격한 마운트 홀요크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문학이 적성에 잘 맞았고 화학에는 서툴렀지만, 화학을 전공으로 택했다. “가장 어려워하는 분야를 전공할 정도로 강인한 사람이라면 어떤 역경이든 이겨낼 것”이란 화학과 교수의 주장에 따랐다.

졸업 후 사회운동가가 된 퍼킨스는 노동 환경의 문제점과 개선안을 들고 의회를 찾아가 끊임없이 법제화를 요구했고, 노동운동의 현장엔 어김없이 찾아갔다. 그런 노력의 결과 뉴욕주 산업위원을 맡게 됐고, 공직 사회와 정치계로부터 행정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래도 겸손했다. 루스벨트가 장관직을 제안했을 때도 자신은 그만한 그릇이 못된다며 몇 번을 거절했다. 루스벨트가 광범위한 노동자 보호 정책을 시행하는 조건을 내건 끝에야 입각에 응했다. 그는 누군가 자신의 전기를 쓸까봐 걱정하며 개인적인 문서조차 남기지 않으려 애썼다. 퍼킨스의 이름은 지금 현대 미국사에 뚜렷하게 남았다.

전후 유럽 복구 계획인 ‘마셜 플랜’으로 유명한 조지 마셜도 학창 시절에는 학습 부진아에 가까웠다. 하지만 형 스튜어트를 따라 사관학교에 가려고 했을 때, 마셜은 집안 이름에 먹칠을 할 것이란 형의 말을 우연히 듣게 됐다. 자신이 가장 좋아했던 형에게서 그런 말을 들은 마셜은 공부에 매진했다. 학교 성적을 올렸고, 버지니아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군인이 된 후 초기 경력도 대외적으로는 주목받기 어려운 병참, 공병, 군수 장교로 전전했다. 성실하고 꼼꼼한 보좌관인 마셜을 상사들은 자기 밑에 두려고 그의 진급을 막았다. 그래도 마셜은 좌절하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보좌관으로 복무한 긴 세월 동안 대학원 과정을 이수하고 독학으로 지식을 쌓았다. 그는 조직력과 행정력으로 군 안팎에서 명성을 얻었다.

미군의 1인자인 참모총장이 된 후에도 미셜은 겸손함과 신중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전후에도 주중대사를 거쳐 국무장관으로 발탁됐다. 루스벨트를 설득해 ‘유럽부흥계획’을 추진했고 성공시켰다. 그의 이름은 ‘마셜 플랜’의 입안자로 세계사에 기록됐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명사의 공통점 중 하나는 겸양이다. 그 첫 단계는 자신이 완벽하거나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저자는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인간의 근원적인 상태를 ‘뒤틀린 목재(crooked timber)’에 빗댄 것을 끌어와 설명한다.

역사적으로 큰 업적을 남긴 인물들의 성장사를 다룬 책들은 이전에도 많았다. 이 책의 강점은 그런 인물들이 자신의 심각한 단점과 결점을 보완하는 과정에서 벌인 노력들에 주목하고 그 의미를 풀어냈다는 것이다. 원제가 ‘인격에 이르는 길(The road to character)’이다. ‘인격을 갖춰야 품격 있는 인간’이라는 뜻을 담은 우리말 제목이 책 내용을 함축적으로 잘 나타낸다.

초기 기독교 사상가인 아우구스티누스와 영국 시인 새뮤얼 존슨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미국 사회를 형성하는데 기여한 인물들을 예로 든다. 미국사나 문화에 대한 배경 지식이 많지 않은 독자로서는 책 속에 등장하는 생소한 지명이나 인명, 정책, 사건과 사고들이 내용에 대한 몰입을 방해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