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계 반도체 업계의 시선이 중국과 대만의 '국공합작(國共合作)' 성사 여부에 쏠리고 있다. 국민당이 이끄는 대만이 반도체 분야에 대한 투자의 문호를 중국 자본에 완전히 열어젖히느냐는 것이 이슈다. 대만은 기술 유출 우려 때문에 중국의 투자를 제한적으로만 허용해왔다. 특히 반도체 설계 분야는 아예 대륙의 투자를 완전 봉쇄해왔다. 그런데 이 같은 반도체 분야 투자 장벽을 허물자는 목소리가 양안(兩岸) 모두에서 터져나오고 있는 것이다.

'반도체 국공합작' 분위기를 이끌고 있는 것은 중화권 반도체 업계를 대표하는 거물 CEO(최고경영자) 3인방이다. 중국 칭화대 산하 국영 반도체 기업인 '칭화유니그룹'의 자오웨이궈(趙偉國·48) 회장, 대만 최대 반도체 설계업체 미디어텍의 차이밍지에(蔡明介·65) 회장, 그리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가공) 산업의 원조인 대만 TSMC의 모리스 창(張忠謀·84) 회장이 그들이다.

중화권 반도체 거물 3인방의 도원결의

자오 회장은 중국 '반도체 굴기'의 돌격대장으로 통한다. 지난 7월 미국 마이크론을 230억달러에 인수하겠다고 제안해 반도체 업계를 놀라게 한 인물이다. 9~10월에는 미국의 샌디스크와 대만 최대 후공정(반도체포장·검사) 업체인 파워텍을 연이어 인수하며 메모리 시장에 진출했다. 이달 초에는 대만 최고의 반도체 설계 기업 미디어텍에 대해 인수 제안을 했다. 그러면서 "반도체 분야에 대한 중국의 투자를 불합리하게 제약해서는 안 된다"고 대만 정부에 투자 개방을 요구했다.

대만 반도체 업계를 이끌고 있는 차이 회장과 모리스 회장이 그를 응원하고 나섰다. 차이 회장은 "중국 업체로 인해 세계 반도체 칩 공급망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며 "대만 반도체 기업이 중국 업체와 협력하면 새로운 역할을 맡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모리스 회장도 "중국 기업이 대만 업체에 더 많은 투자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국 반도체 산업의 두 거두가 입을 모으자, 대만 정부도 "투자가 금지됐던 반도체 설계 분야에 대한 중국 자본의 투자를 허용하는 것을 포함한 문호 개방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반도체 업계의 판도를 바꿀 수도 있는 '반도체 국공합작'의 세 주역,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흙수저' 출신 자오웨이궈

3인방 중 최연소인 중국의 자오 회장은 요즘 우리 기준으로 보면 전형적인 '흙수저 집안' 출신이다. 그의 부모는 '우익 분자'로 낙인찍혀 중국의 변방 신장으로 하방당한 사람들이었다. 어린 시절 자오는 베이징보다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이 더 가까운 오지에서 돼지와 양을 키우며 자랐다. 2남 1녀의 장남인 그는 다섯 살 때 일을 나간 부모님을 대신해 세 살배기 동생을 챙겼다고 한다. 머리가 비상했던 그는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부활한 대학입시를 통해 명문 칭화대 공대에 입학했다. "기술을 배우면 정치 격변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아버지의 당부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엔지니어보다는 자본가라고 할 만큼 비즈니스에 능한 사람이다. 학창 시절에는 중국의 실리콘밸리라고 불리는 '중관촌'에서 TV 수리와 프로그래밍으로 학비를 벌었다. 대학 졸업 후 칭화대학 투자 부문에서 일하다 2000년 고향 신장으로 돌아가 부동산 투자 등으로 큰돈을 번 뒤 8년 만에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칭화유니그룹에선 보험과 펀드 투자로 벌어들인 돈으로 중국과 미국, 대만의 반도체 업체들을 잇따라 인수한 그는 "2020년 세계 3위 반도체 업체가 되겠다"는 야심을 불태우고 있다.

◇산자이의 아버지, 차이밍지에

대만 국내외 언론들은 차이 회장을 '산자이(山寨·짝퉁)의 왕'이라고 부른다. 미디어텍의 최대 고객이 흔히 '산자이'로 불리는 중국산 저가 휴대폰을 만드는 중국 메이커들이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한 뒤 TV 및 CD플레이어용 반도체를 만들던 그는 2000년부터 휴대폰용 칩 시장에 뛰어들었다. 다른 업체들이 모두 3G(3세대 이동통신)용 칩에만 정신을 팔고 있을 때 그는 한물 간 2G(2세대 이동통신)용 칩에 주력했다. 당장 첨단 제품을 소비하기 힘든 중국과 같은 저가 시장을 겨냥한 전략이었다.

특히 그의 비즈니스 모델은 칩만 파는 것이 아니라, 각 휴대폰 메이커들이 원하는 칩을 설계부터 시작해 모든 걸 만들어주는 턴키(일괄 제조) 방식이었다. 기술이 없어 고민하던 중국 제조사들은 미디어텍 덕분에 무더기로 휴대폰 시장에 진입했고, 덕분에 미디어텍은 저가 모바일 칩 시장의 강자로 떠올랐다. 미디어텍은 애플 아이폰의 출현으로 시작된 스마트폰 시대에 적응하지 못해 한때 심각한 위기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이를 극복하고 지금은 퀄컴에 이어 세계 2위의 모바일 응용프로세서(AP) 메이커의 지위를 지키고 있다.

차이 회장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저명한 학자 크리스텐센 교수에게 감화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앞으로는 현존하는 기술의 연장선이 아닌, 비연속적 성격의 융복합 기술이 IT 시대 이후를 책임질 것"이라는 크리스텐센 교수의 지론을 실제로 구현한 인물이 차이 회장이다.

그는 구내 식당에서 줄을 서 식사할 만큼 소탈하다. 인터뷰는 극히 꺼리면서도 최신의 기술 트렌드를 소개하는 칼럼을 신문에 연재하고, 역사서를 탐독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위탁생산 창시자 모리스 창

8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반도체 업계를 지키고 있는 모리스 창 회장은 '파운드리'를 하나의 산업 분야로 만든 인물이다. 그가 창업한 TSMC는 세계 반도체 위탁생산 분야 일감의 70%를 휩쓸고 있다. 미국 MIT에서 기계공학을 배운 뒤 독학으로 반도체 분야를 공부한 그는 미국 반도체 회사인 텍사트 인스트루먼트에 입사, 부사장까지 올랐다.

승승장구하던 1985년 돌연 대만으로 건너가 오랫동안 구상해 왔던 위탁생산 회사, TSMC(Taiwan Semiconductor Manufacturing Company·대만 반도체 제조사)를 차렸다. 반도체 생산 설비를 갖추려면 수조원의 투자가 필요하지만 소규모 설계회사들은 이 같은 투자 능력이 없다. 이 같은 사실을 간파, 설계와 생산을 분리하는 모험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설계부터 제조까지 전부를 한 회사가 담당하던 인텔 모델이 절대 규범이었던 시대에 그의 혁신적인 도전으로 인해 설계만을 전문으로 하는 반도체 기업들이 속속 출현하는 등 산업 지형도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의 고향은 중국 상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