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시중은행의 기업여신 담당자들은 대기업을 대상으로 신용위험평가를 진행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300~400개 대기업 중 워크아웃(기업재무구조개선작업), 법정관리(회생절차) 대상 기업을 골라내느라 바쁜 하루하루를 보낸다. 금융당국이 "좀비 기업을 꼼꼼히 추려내라"고 연일 주문하고 있어 혹시나 놓치는 것이 없는지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고 있다.

그런데 이 일련의 작업이 하나 마나 한 일이 될 가능성이 생기고 있다. 워크아웃의 법적 근거인 기업구조조정촉진법(이하 기촉법) 상시화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지 못할 수 있어서다. 현행 기촉법은 한시법이라서 연말이 지나면 효력이 사라진다.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면 내년부터는 워크아웃을 실시할 수 없게 된다. 야당은 지난 18일 기촉법 대신 도산법(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으로 구조조정을 하자고 제안했다.

야당이 워크아웃을 폐지하자고 하는 이유는 크게 2가지다. 첫번째는 워크아웃이 관치의 수단이 돼 왔고, 두번째는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제도라는 것이다.

야당의 주장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법정관리는 기업구조조정의 단일 수단이 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제도다. 신속하게 청산가치, 계속기업가치를 산정해 살릴 기업과 죽일 기업을 선별하고 빠른 속도로 정상화를 시도할 수 있다. 채권은행이 신규 자금을 투입하기 어렵다는 게 가장 큰 단점인데, 야당은 채권은행이 신규 자금을 우선 변제받는 내용을 개정안에 담았다.

염려되는 것은 '시간'이다. 과연 여야는 다음 달 18일까지인 회기 내에 도산법 개정안을 국회 본회의까지 통과시킬 수 있을까? 온갖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도산법 개정안을 말이다. 현실적으로 이번 회기 내 도산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처리하기는 어렵다.

도산법 개정안에 대해선 행정부와 사법부의 생각이 다르고, 채권은행과 투자자, 사측, 노조의 이해관계도 다르다. 법 하나 통과되는데 2~3년씩 걸리기도 하는 요즘 국회에서 한 달 반 만에 이같이 어려운 사안이 조율될 수 있을까.

야당이 정말로 기업구조조정의 통로를 도산법으로 단일화하는 방안을 고심하고 있다고 해도 이를 당장 추진하기는 힘들다. 금융위가 기촉법 상시화를 준비한 지 벌써 1년이 넘었다. 지난 1년여간 가타부타 언급이 없다가 일몰 시점이 다 돼서 "그 법은 버리자"고 말하면 법을 토대로 기업구조조정을 준비하던 시장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야당이 기촉법에 반대한다고 해도 일단은 한시법으로 기업구조조정의 숨통을 트여줘야 한다. 그리고 내년에 다시 도산법으로 일원화하는 내용을 논의하는 것이 맞다. 자칫하다간 내년초 수십개 대기업이 줄줄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초유의 사태가 빚어질 수 있다.

기촉법은 오늘(25일) 국회 법안소위에서 논의된다. 여야가 접점을 찾지 못하면 예산안 처리 등 다른 현안에 휩쓸려 기촉법은 연내 통과되지 못할 수 있다는 게 국회 관계자들의 얘기다. 여야가 합의점을 잘 찾아 시장에 혼란이 발생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정치가 경제의 발목을 잡는 일이 되풀이되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