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말 현재 우리나라에서 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대기자로 등록된 환자는 2만7079명에 이른다. 매년 3000명 이상이 새로 등록되고, 1000명은 이식을 기다리다가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다. 이제 환자와 가족들이 더 이상 기증자를 무작정 기다리지 않아도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과학자들이 돼지 등 다른 동물의 장기를 사람에게 이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돼지 장기를 인간에게 이식한다

국제 학술지 '네이처'는 최신호에서 "돼지의 각막, 폐, 신장, 심장, 간, 췌장 등 다양한 장기를 인간에게 이종이식(異種移植)하기 위한 연구가 최근 '유전자 가위' 기술과 결합하면서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다"고 밝혔다. 유전자 가위란 물리적인 가위는 아니고, 원하는 DNA만 골라서 제거하거나 편집할 수 있는 기술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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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의 장기를 사람에게 이식하려는 시도는 1960년대에 시작됐다. 당시 과학자들은 신부전증 환자에게 개코원숭이와 침팬지, 돼지의 신장을 이식했다. 영장류가 아닌 돼지가 이식에 사용된 것은 인간과 장기 크기가 비슷한 데다, 키우기 쉽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물 장기를 이식한 뒤 가장 경과가 좋은 경우도 수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환자의 면역 체계가 동물의 장기를 이물질로 인식하고 공격해서 파괴했기 때문이다. 면역 거부 반응을 유발하는 돼지 유전자(DNA)가 밝혀지고 이를 억제하는 연구가 진행됐지만 아직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지지부진하던 이종이식 연구는 최근 몇 년 사이 획기적인 진전을 이뤘다. '크리스퍼(CRISPR) 유전자 가위' 덕분이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잘라내고 싶은 특정한 DNA에만 결합하는 유전물질인 RNA와, DNA를 잘라낼 수 있는 효소를 결합시킨 형태다. RNA의 종류를 다양하게 만들면 어떤 종류의 DNA도 잘라낼 수 있다.

미국 하버드대의 조지 처치 교수는 지난달 크리스퍼를 이용, 돼지 세포에서 인간에게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DNA 조각 62개를 한 번에 잘라내는 데 성공했다. 처치 교수는 "1년 안에 돼지에서 영장류에게 이식할 수 있는 실험용 장기를 얻어낼 수 있다"고 밝혔다. 처치 교수는 생명공학기업 e제너시스를 설립, 본격적인 이종장기 생산을 준비하고 있다.

인디애나대의 조지프 텍터 박사는 네이처와 인터뷰에서 "과거의 방식으로 돼지 DNA 하나를 변형시키기 위해서는 3년 이상이 소요됐지만, 이제는 몇 달 안에 여러 개의 DNA를 변형시킨 돼지를 만들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미국 소크연구소는 돼지에서 인간의 장기가 자라게 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돼지 수정란에서 특정 장기를 만들 유전자를 없애고 인간 배아줄기세포를 넣어서 인간의 장기가 자라게 하는 것이다.

새로운 질병 생길 수도

중국 정부는 지난 4월 돼지 각막을 인간에게 사용하는 것을 허용했다. 미국의 바이오기업 유나이티드세라퓨틱스는 5년 내에 돼지 장기를 실제 사람에게 이식하는 임상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이를 위해 노스캐롤라이나에 연간 1000개의 돼지 장기를 생산할 수 있는 농장을 건설 중이다. 개코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돼지 장기 이식 실험은 심장·신장 등이 이미 성공 단계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사람에게 이식하기까지는 아직 넘어야 할 장벽이 많다. 돼지의 수명은 10년 정도에 불과하다. 사람의 수명이 훨씬 긴 만큼, 돼지 장기를 이식받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아서 다시 이식 수술을 받아야 할 가능성이 크다. 돼지의 장기를 사람이 이식받았을 때 새로운 형태의 질병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이종 장기 이식이 완벽하게 안전한 것으로 판명되지 않는다면, 다른 치료 방법이 없는 치명적인 환자에게만 선별적으로 허용돼야 한다"는 공식 입장을 밝히고 있다. '사이언스'지는 돼지 배아와 인간 배아줄기세포를 결합하는 실험에 대해 "사람과 돼지가 섞인 키메라(Chimera·사자·양·뱀이 섞인 그리스 신화의 괴물)가 나올 것이라는 우려가 있다"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