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현지시각) 저녁 7시 미국 텍사스 주 오스틴 다운타운. 비 내리는 어둑한 저녁 오스틴 컨벤션 센터가 갑자기 환해지며 시끌벅적해졌다. 이 시각 미국컴퓨터학회(ACM)과 국제전기전자기술자협회(IEEE)가 주최하는 ‘2015 슈퍼컴퓨팅 학술대회(SC15)’의 전시부스가 공개됐기 때문이다.

16일(현지시각) 미국 오스틴의 오스틴컨벤션센터에서 ‘2015 슈퍼컴퓨팅 컨퍼런스’가 열렸다. 전 세계 슈퍼컴퓨터 관계자들이 이날 전시회장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은 미국의 국가슈퍼컴퓨팅응용센터(NCSA) 부스.

슈퍼컴퓨팅 학술대회는 다양한 세미나와 전시회로 구성됐는데, 전시회는 갈라 리셉션으로 시작한다. 갈라 리셉션엔 전시회 부스를 만든 연구기관과 기업 관계자만 참가할 수 있다. 사람들이 몰리기 전날 저녁 전세계 슈퍼컴퓨팅 관계자들에게 전시회를 미리 구경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이 학술대회의 전통이다.

일반 관람객이 없는 데도 부스마다 사람들로 넘쳐났다. 참가자들은 부스 곳곳에 마련된 햄버거나 치즈 등 ‘핑거푸드’로 저녁 한끼를 때우며 전시회장을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올해 전시회에는 전 세계에서 온 슈퍼컴 연구 대학, 슈퍼컴 운영 센터와 기업 등 총 352개 업체가 참가했다.

이날 행사장에는 깃발이 나부끼듯 ‘엑사스케일 컴퓨팅(exascale computing)’이라는 단어가 눈에 곳곳에 띄었다. 엑사스케일 컴퓨팅이란 1초당 100경회 계산할 수 있는 엑사플롭스(Exaflops) 급 컴퓨터를 말한다. 1경(京)은 1조(兆)의 만 배인 자연수이다. 10000000000000000(10의 16승)이다!

일본 슈퍼컴의 자존심 이화학연구소(RIKEN)도 엑사스케일 경쟁에 뛰어든 대표적인 연구소 중 하나였다. 이 연구소가 만든 K 컴퓨터는 한때 세계에서 가장 빠른 슈퍼컴퓨터였고 2015년 11월 현재에도 톱 4위에 오를 만큼 빠르다.

사토 미츠시다 이화학연구소 선임 연구원

부스에서 만난 사토 미츠시다 이화학연구소 선임 연구원은 일본 컴퓨터 기업 후지쯔와 연구소가 공동 진행하는 ‘엑사스케일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였다.

그는 “10페타프롭스 성능의 K컴퓨터보다 100배 빠른 컴퓨터를 100% 일본 자체 기술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며 “전력 소비가 적고 집적도가 높은 칩을 개발해 대만 TSMC의 10나노공정으로 위탁생산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슈퍼컴 강국의 위상을 되찾겠다며 이 프로젝트에 대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인텔과 마이크론은 아예 새롭게 설계한 칩과 메모리로 엑사스케일 컴퓨팅의 꿈에 도전하고 있었다. 기존 칩과 저정장치로는 더 이상 성능을 개선하기 어려울 만큼 집적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슈퍼컴퓨터 성능 개선 속도는 둔화하고 있는 편이다. 전세계 500대 슈퍼컴 성능은 2008년까지만 해도 매년 평균 90%씩 성장했지만, 2009년 이후에는 연평균 35% 성장하는 데 그쳤다.

이날 인텔은 슈퍼컴에 최적화한 새로운 아키텍처인 ‘SSF(Intel Scalable System Framework)’와 ‘OPF(Omni-Path Fabric) 드라이브’을 내놓았다. 이 기술을 이용하면, 일반 산업계에서도 더 많이 슈퍼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게 인텔의 설명이었다. 또 전시회 안팎에서는 인텔도 전력 소모량 절감을 위해 곧 10나노 기반의 미세공정에 돌입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마이크론과 인텔가 공동 개발한 ‘3D X포인트 메모리’ 웨이퍼

마이크론 부스에서는 마이크론과 인텔이 공동 개발한 차세대 메모리인 ‘3D X포인트 메모리’의 웨이퍼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두 회사는 지난 7월 기존 낸드 메모리보다 1000배 빠르고 1000배 튼튼한 메모리를 개발했다고 주장해 반도체 업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터였다.

마이크론 관계자는 “3D X포인트 메모리는 폭증하는 데이터를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는 혁신적인 메모리”라면서 “기계를 학습시키는 머신러닝부터 실시간 질병 추적, 풀HD보다 16배 선명한 8K 몰입형 게임에 폭넓게 쓰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픽 칩(GPU) 개발업체였던 엔비디아가 슈퍼컴 세계의 확실한 강자로 부상 중이라는 점도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이 회사는 GPU를 전력을 적게 소모하면서도 성능을 높이는 가속 프로세서로 발전시켜 왔다.

엔비디아는 이 자리에서 GPU 기술을 이용해 테슬라의 자동차를 학습(머신 러닝)시키는 과정을 시연했다. 또 IBM의 지능형 슈퍼컴퓨터 ‘왓슨’도 처리 속도를 높이기 위해 엔비디아 칩을 사용할 것이라는 낭보를 전했다.

엔비디아 관계자는 “엑사스케일급 컴퓨터를 만드는 데 가장 큰 도전 과제 중 하나가 전력 소모량을 줄이는 것이기 때문에 이번 학술대회에서 저전력 기술에 관한 논의도 활발하다”면서“성능당 전력 소모량을 현재 수준보다 50분의 1까지 줄이지 않으면, 슈퍼컴을 운영하는 데 대형 수력 발전소가 생산하는 만큼의 전력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금원 KISTI 슈퍼컴퓨팅융합연구센터 센터장은 “엑사스케일 컴퓨팅은 칩, 저장장치, 네트워크, 클러스터링 방법부터 운영체제와 응용 소프트웨어까지 컴퓨터 설계를 완전히 새롭게 해야 달성할 수 있는 어려운 목표”라면서 “이번에 소개된 거의 모든 기술들이 엑사스케일 컴퓨팅을 구현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는 삼성전자 칩(엑시노스)를 활용한 8노드 슈퍼컴 시제품을 선보였다.

아쉬운 점은 엑사스케일 컴퓨팅 도전은 미국, 중국, 일본 3국만의 대결로 압축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중국은 이날 발표된 전세계 슈퍼컴 500대 순위에서 6회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이들 국가는 엑사스케일 컴퓨터로 신약 개발, 우주 탐사 등 거대 문제 해결에 속도를 내겠다는 전략이다. 슈퍼컴퓨팅 학회는 이르면 2020년이면 엑사스케일 컴퓨팅이 등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조 센터장은 “한국에서도 2020년까지 한국형 슈퍼컴을 만들자는 ‘슈퍼 코리아 2020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라면서 “KISIT 역사 향후 5년 내 30페타플롭스 급 이상의 슈퍼컴퓨터를 운영하는 계획을 세웠다”고 덧붙였다.

한국에서는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서울대가 이번 학술대회에 전시 부스를 마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