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으로 인해 삼성그룹 계열사 간에 새로운 순환출자 구조가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3년 공정거래법이 개정되면서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에 속하는 주요 재벌 그룹들은 새로 순환출자를 할 수 없도록 금지됐다. 따라서 삼성그룹은 6개월 안에 신규 순환출자 고리를 없애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일부 계열사 주식을 매각해야 한다.

5일 공정거래위원회 관계자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과의 합병 등기를 마친 지난달부터 합병으로 인해 삼성그룹 지배구조에 신규 순환출자가 발생했는지에 대한 검토 작업을 진행했다"면서 "검토 결과 두 회사의 합병으로 인해 일부 순환출자가 새로 생기거나 기존의 순환출자 고리가 강화된 것으로 결론 내리고, 이에 대해 제재하기로 방침을 정했다"고 밝혔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으로 새 순환출자고리 생겨

문제가 된 순환출자 고리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하면서 발생했다. 기존에 있던 '제일모직→삼성생명→삼성화재→삼성물산→제일모직' 같은 출자구조가 '합병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화재→합병삼성물산' 같은 형태로 바뀐 것이다. 앞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반대했던 미국 헤지펀드 '엘리엇'은 지난 6월 "삼성물산의 합병으로 인해 5개의 신규 순환출자 고리가 생기며, 이는 신규 순환출자 생성을 금지하는 한국의 공정거래법에 위반된다"고 주장했었다. 삼성은 합병으로 인해 신규 순환출자 고리가 발생하는지를 공정위에 정식으로 질의했다.

정부 관계자는 "검토 결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새 순환출자 고리를 만들어 냈거나 기존에 있던 순환출자 고리를 강화했기 때문에 제재 대상인 것으로 결론 내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순환출자 고리가 새로 만들어진 것인지, 어떤 것은 별문제가 없는지에 대해서는 공개하지 않았다. 정부 관계자는 "주식을 처분해야 하거나 매각 대상이 되는 계열사의 주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공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공정위의 결정 내용이 통보되면 삼성그룹은 새로 발생한 순환출자 고리를 끊기 위해 주식을 처분하거나, 계열사를 매각해야 한다.

자본시장 전문가들은 '(삼성물산→제일모직)→삼성생명→삼성화재→삼성물산' 경우처럼 두 회사의 합병으로 인해 순환출자 고리가 단순화된 것은 문제가 안 되고, '합병삼성물산(옛 제일모직)→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전기→합병삼성물산(옛 제일모직)'처럼 새 순환출자 고리가 생긴 것이 문제가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삼성그룹, 수조원대 계열사 주식 매각해야 할 수도

신규 순환출자 고리를 끊기 위해 어떤 계열사 주식을 팔아야 하는지는 삼성이 결정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합병삼성물산→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전기→합병삼성물산' 고리의 경우, 삼성전기가 가진 합병삼성물산 지분(2.61%, 주식 시가 7500억원)을 팔아서 순환출자 고리를 끊는 것이 삼성 측 입장에서 가장 부담이 적다. 반면 삼성생명이 가진 삼성전자 지분(6.24%)을 판다고 가정하면 총 14조원대에 이르는 주식을 시장에 내놔야 한다.〈그래픽 참조

공정위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으로 인해 삼성 그룹 계열사 간에 새로 발생한 순환출자고리로 판단한 경우가 몇 건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경우에 따라선 삼성그룹이 수조원대 계열사 주식을 팔아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이렇게 될 경우 주식시장은 대량 매물이 쏟아져 적잖은 충격을 받을 수 있다.

다만 업계에서는 삼성물산이 주식을 처분해 계열사 간 고리가 끊긴다고 해도, 삼성의 지배구조에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가령 'A→B→C→D→A'로 연결되는 구조에서 D사의 주식을 처분해 C사와 D사 사이의 연결고리가 끊긴다고 하더라도, 이재용 부회장이 D사의 주식을 다량 보유하는 등 확실히 지배하고 있을 경우, 기존처럼 순환출자를 통해 그룹을 지배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삼성 관계자는 "공정위로부터 아직 통보받은 게 없으며, 공정위가 통보해오면 그에 따르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