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업으로 출발한 일본계 금융그룹 J트러스트가 내년부터 프로야구팀인 히어로즈(현재 넥센 히어로즈)의 제1 후원기업으로 계약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져 야구팬들 사이에 논란이 분분하다. 스폰서 체제로 운영되어온 히어로즈가 자금이 풍부한 회사로부터 지원을 받아서 전보다 안정적으로 살림살이를 꾸려나갈 수 있으리라는 전망도 나오지만, 한편으론 '국민 스포츠'인 프로야구팀이 대부업 회사로 출발한 일본계 제2금융권 회사의 이름을 달고 뛴다는 데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한국 프로야구의 34년 역사에서 전년과 같은 팀으로 야구를 했던 해는 절반을 간신히 넘긴 18년에 불과하다. 원년(元年)의 이름을 그대로 갖춘 팀은 삼성 라이온즈와 롯데 자이언츠 둘뿐이다. 두 해가 멀다 하고 모기업이 바뀌는 한국 프로야구의 변천사는 한국 산업의 흥망성쇠를 담고 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각 시대를 이끌던 산업들이 야구 리그에 들어왔다가 산업의 쇠락과 함께 사라졌다. 이런 이유로 가계 부채(負債)가 연일 사상 최대치를 경신하는 '빚의 시대'에 제2금융권 회사가 야구팀을 노리는 것이 놀랄 만한 일도 아니라는 얘기가 나온다.

◇1980~1990년대, 식료품·의류 산업의 시대

한국 프로야구는 1982년 3월 27일 동대문야구장에서 MBC 청룡과 삼성 라이온즈의 개막전으로 출발했다. 전두환 정권 주도로 리그가 만들어졌기에, 정부가 지역별로 지정한 기업들이 팀을 하나씩 맡았다. 대기업인 삼성·해태·롯데·OB(모기업 두산)와 프로야구 리그를 사실상 정부와 함께 기획했던 MBC, 철강·건설 회사인 삼미 등이 야구단과 연고지를 하나씩 담당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그래픽 뉴스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프로야구 출범 후 약 10년 동안 야구단 모기업으로 이름을 가장 많이 올린 업종은 의류·식음료 회사였다. 이 시기에 리그에 들고 난 팀 11개 중 절반 가까운 5개(청보·빙그레·쌍방울·해태·OB)가 식음료·의류와 연관된 회사의 이름을 달고 뛰었다.

1980년대 중반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지금(약 2만8000달러)의 10분의 1도 안 되는 2400달러 수준이었다. 먹고 입는 문제가 가장 중요했던 시절, 제과·음료·의류 등이 다른 산업에 비해 호황을 누렸다. 모기업이 청바지·라면 등을 만들던 청보 핀토스, 내복 회사를 모기업으로 둔 쌍방울 레이더스가 차례로 프로야구에 입성했던 1980~1990년대 초반은 한국 섬유·의류산업의 전성기였다. 통계청 '제조업 생산능력지수'(제품을 얼마나 생산할 수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수, 2010년을 100으로 설정)에 따르면 당시 제조업 평균은 20 초반 수준이었는데, 섬유·의류업 지수는 역대 최고 수준인 280~350을 오가며 모든 제조업 중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빙그레(이글스, 1986년 7번째 팀으로 창단), 해태(타이거스) 등 제과 업종도 다른 산업보다 경쟁력이 강했다. 제과 업종의 생산능력지수는 전체 제조업의 3배 수준인 60대를 오갔다.

◇외환위기 이후 '재벌들의 리그'

1990년대 초 제조업 GDP의 30%(현재 9%)를 차지하며 한국 경제를 이끌던 의류·식품 산업은 1990년대 중반부터 내리막길을 걸었다. 특히 의류 산업은 중국·동남아산(産) 값싼 제품이 한국 기업들의 수출과 내수 시장을 잠식하면서 산업 구조가 악화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쌍방울 레이더스가 창단된 1991년 한국의 의복 제품 및 의복 부속품 수출액(74억2000만달러)은 수입액(1억8500만달러)의 40배에 달했다. 그러나 쌍방울이 파산해 구단을 매각한 1999년에 의복 제품 및 의복 부속품 수출(48억7000만달러)은 8년 전보다 34% 감소했고 수입(7억6300만달러)은 500% 늘어난 상태였다.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자금난에 빠졌던 청보 핀토스가 태평양(돌핀스)에 팀을 팔고, 부도가 난 쌍방울이 1999년 SK에 팀을 넘기면서 의류 업체는 야구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1998년 4월 전주에서 열린 쌍방울 레이더스 대 삼성 라이온즈 프로야구 경기. 내복 업체인 쌍방울은 1991년 구단을 창단했으나, 의류업 침체로 부도가 나면서 1999년을 마지막으로 야구장에서 사라졌다.

140만명의 실업자가 생긴 외환위기 이후 내수 침체로 식음료 산업도 대거 무너졌다. 1997년 부도가 나 1998년 정부의 '퇴출 대상 기업'에 들어간 해태는 야구팀을 기아에 팔았다. 맥주 상표 'OB'를 달고 뛰었던 OB베어스도 '두산 베어스'로 다시 출발했다. 모기업인 두산이 외환위기 이후 그룹 구조조정 차원에서 OB맥주를 벨기에 맥주 회사인 AB인베브에 매각한 결과였다. 앞서 '빙그레 이글스'는 오너 형제간 법정 공방이 일고 빙그레가 한화에서 계열 분리를 추진하면서 1994년 팀 이름에서 '빙그레'를 떼고 이를 '한화'로 바꿔 달았다. 한국 프로야구의 첫 10년을 이끌었던 패션·식음료 회사 중 20세기를 넘긴 회사는 하나도 없었던 셈이다.

외환위기 이후 프로야구는 재벌 독주 시대를 맞는다. 2001년부터 2007년까지 7년 동안 한국 프로야구엔 기아(1998년 현대차가 인수)·두산·롯데·삼성·현대·한화·LG·SK 등 오로지 재벌 회사들만 참여했다. '재벌들만의 리그'는 현대그룹의 정몽헌 회장이 2003년 세상을 뜨고 나서 그룹을 이어받은 정 전 회장의 부인 현정은 회장이 야구팀 지원을 중단함으로써 끝이 났다. 현대 유니콘스는 사라지고, 한국 최초로 투자회사가 인수해 모기업의 재정 지원 없이, 변경 가능한 '스폰서' 지원으로 팀을 운영하는 히어로즈가 만들어졌다.

◇정보통신 약진, 2금융권 입질

한국 경제와 프로야구의 싱싱한 '뉴 플레이어'로 등장한 업종은 ICT(정보통신기술)이다. ICT산업은 지난 10년 동안 다른 산업(3.1%)의 2.4배 수준인 연평균 7.6%씩 성장하며 한국 경제에 불을 지폈는데, 이런 추세가 프로야구 리그에도 반영됐다. 2013년 게임 회사인 NC소프트가 한국 프로야구 리그 9번째 팀인 'NC 다이노스'를 창단했다. 올해는 통신 회사인 KT의 'KT 위즈'가 합류해 10개 구단 체제가 갖춰졌다.

최근 일본계 제2금융권 회사인 J트러스트가 히어로즈와 후원 계약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단군 이래 최대 부채' 시대에 진입한 한국의 경제 상황을 반영한 결과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한국의 가계 부채는 GDP의 80%가 넘는 1130조원에 달한다. 특히 가계 신용대출은 시중은행(올해 상반기 약 1조원 증가)보다 제2금융권(약 7조원 증가)에서 빠르게 늘고 있다.

이처럼 한국 프로야구단은 자생력 없이 모기업의 부침(浮沈)에 따라 팀 이름이 바뀌는 일이 반복돼 왔다. 열렬한 야구팬으로 '야구예찬'이라는 책까지 낸 정운찬 전 총리는 "장기적으로 야구단이 프로구단다운 수익을 낼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야구단이 매년 수십억원씩 지방자치단체에 구장 임차료를 내면서 구장 광고 수익까지 상당 부분 지자체에 주는 한국 프로야구의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정 전 총리는 "지방자치단체들이 구장 사용료를 대폭 낮춰주고, 아울러 다양한 수익을 낼 수 있게 해줘야 진정한 프로구단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