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죠."(40대 주부 이모씨)

대구에 사는 주부 이씨는 지난주 은행과 저축은행 4곳에 흩어져 있던 돈 5000만원을 한데 모아 제주항공 공모주 청약에 나섰다. 이씨는 "은행 이자가 형편없어서 예금해봤자 별 실익이 없는데, 공모주는 손실볼 확률이 낮다고 해서 시작해봤다"면서 "블로그나 지인 조언을 참고하는데, 연 10%대 수익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씨처럼 공모주 투자에 뛰어드는 신규 자금이 급증하면서 올해 공모주 시장 덩치가 커졌다. 수천대 일 경쟁률은 예사고, 청약자금 6조원을 넘기는 대어(大魚)도 많아졌다. 올해 상장한 기업 5곳(토니모리·제주항공·이노션·파마리서치프로덕트·더블유게임즈)이 청약증거금 기준으로 역대 상위 5~9위를 휩쓸었을 정도다.

초저금리로 갈 곳을 잃은 시중 뭉칫돈이 조금이라도 높은 수익이 기대되는 상품으로 움직이고 있다. 장기적인 전망은 어둡다고 보고, 시간을 짧게 끊어서 왔다갔다 방황하는 자금이란 의미에서 노마드 머니(Nomad Money·유목민처럼 떠도는 자금)라고도 불린다.

1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8월 말 기준으로 단기 부동자금은 898조8125억원으로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작년 12월 말(794조7000억원)에 비해 8개월 만에 언제라도 현금화할 수 있는 돈이 100조원 넘게 늘어난 것이다. 월별 증가 추이와 속도를 고려한다면, 연내 900조원은 너끈히 돌파할 전망이다. 이렇게 만기를 1년 이내로 가져가는 단기 금융상품에 돈이 몰린다는 것은 투자처를 찾지 못한 대기성 자금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 장호준 SC은행 전무는 "초저금리로 예금 이자는 낮고, 주식시장도 부진하다 보니 시중 자금이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고 있다"면서 "수익에 목마른 900조원은 기회다 싶으면 우르르 움직이면서 곳곳에서 자금 쏠림 현상을 심화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초저금리 속 사상 최대 노마드 머니

"1억원이면 전세 끼고 아파트 10채도 살 수 있어요. 1500만원 올랐을 때 다 팔고 나오면 100% 수익률이죠." 여유 자금 1억원을 어디에 굴릴까 고민하던 40대 회사원 김모씨는 최근 한 중개업자의 이런 제안에 귀가 솔깃해졌다. 제철소가 있는 지방 도시의 소형 아파트 가격이 지금 6000만원 정도인데, 전세금은 5000만원으로 높으니 전세 끼고 10채를 사놓으라는 얘기였다. 매매가와 전세 차이(갭)가 크지 않은 아파트를 사들여서 시세 차익을 노리는 이른바 '갭(Gap)투자'다.

올해 전국 아파트 평균 전세가율(매매가 대비 전세금 비율)이 72.9%로 사상 최고치로 치솟으면서 성행하는 신종 투자법이다. 박상언 유엔알컨설팅 대표는 "부동산 시장 자금은 갈수록 운용 주기가 짧아지고 있다"면서 "지방 분양 시장은 전매가 바로 가능하고 계약 청약자금도 1000만원 이내로 작다 보니 짧게 치고 빠지는 사람들이 많아 경쟁률이 수백대일을 예사로 넘는 것"이라고 말했다.

수익에 갈증난 부동 자금 900조원은 금융시장 풍속도도 바꿔나가고 있다. 헤지펀드·메자닌·스팩(SPAC)·비상장주식 등 기존 성과가 좋았다고 소문난 상품은 후속작이 출시되자마자 순식간에 대기 자금이 몰려들면서 한도가 동나고 있다. 금융시장에 '5분 완판(完販)' 상품이란 트렌드가 등장한 것도, 은행 1년 예금 금리가 사상 최저인 1.6%로 떨어진 올해부터다.

◇잉여 자금이 거품 키우며 혼란 가중

2년 전만 해도 시중은행의 1년 이상 정기예금 금리는 연 3%가 넘었다. 6개월 미만 예금 금리와의 차이는 0.46%포인트 벌어져서 돈을 단기로 굴려야 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지난 9월 기준 1년짜리 정기예금 금리는 연 1.6%인 데 반해, 6개월 미만 예금 금리는 연 1.42%로 거의 차이가 나지 않게 됐다.

신동준 하나금융투자 자산전략본부장은 “미래 성장이나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가 줄어들다 보니 장기 금융상품의 매력도가 하락한 것”이라고 말했다.

시중 자금의 단기화 추세 속에 아예 장기 예금보다는 단기성 목돈에 더 높은 금리를 주는 상품까지 등장했다. SC은행의 마이플러스통장은 1000만원 이상 맡기면 연 1.66%(세전·2일 기준)를 지급하는데, 자금이 묶이지 않고 수시입출금이 가능한 데도 1년제 정기예금(1.2~1.6%)보다 이자를 더 준다.

전문가들은 자금의 단기화가 경제 전반에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강대권 유경PSG자산운용 본부장은 “시중 자금이 늘어나면서 불량 자산마저도 두세 배씩 가격이 부풀어 오르는 기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면서 “부동산·금융 모두 가격 상승 기대감에 남들 따라서 우르르 투자했다가 상황이 바뀐 줄도 모르고 빠져나오지 못하면 손실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