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외환시장에 개입한다는 주장은 미국 행정부와 의회가 항상 해온 얘기로 별로 새로울 게 없습니다."(기획재정부 간부)

지난 16일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 측이 "한국이 더는 환율 조작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문구를 '한·미 관계 현황 공동설명서'(Joint Fact Sheet)에 넣자고 제안해 양국 간 실무협상이 진통을 겪었다는 뉴스〈본지 19일자 B1면〉가 보도된 19일, 외환정책을 총괄하는 기획재정부는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 기재부 간부는 "한국 기업들에 시장을 잠식당한 자동차·철강 등 미국 업체들의 로비를 받은 미 의회가 한국의 환율 조작 의혹을 끊임없이 제기해왔다"면서 "의회 내 소수당인 미국 민주당 정부가 의회와 정치권을 달래기 위해 '국내 정치용'으로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외환 당국 출신 전직 관료나 민간 전문가들의 반응은 다르다. 기재부 국제경제 담당 차관보 출신인 A씨는 "미국 재무부가 우리 외환 당국과 협의하는 과정에서 환율 문제를 언급한 적은 있지만, 정상회담에서 의제로 포함시키자고 한 것은 내 기억으론 처음 있는 일"이라며 "미국이 앞으로 한국에 대한 환율 공세를 강화하겠다는 신호탄으로 해석하고 대응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재정경제부 차관과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낸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은 "미국의 금리 인상이 예정된 상황에서 장기적으로 달러화는 강세를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미국이 급격한 달러 강세로 경상수지 적자가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한국처럼 대미 무역 흑자를 기록한 국가들을 상대로 환율 공세를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중국과 일본엔 면죄부, 한국만 정조준

실제로 미국은 올 들어 한국 환율정책에 대한 공세 수위를 높여 왔다. 미 재무부는 지난 4월 상반기 환율보고서에서 "한국이 올해 초 원화 가치의 상승을 막고자 외환시장에 개입한 의혹이 있다. 한국 정부가 외환시장 개입을 줄여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고 공개 경고했다. 미 재무부는 19일 낸 하반기 환율보고서에서도 "한국이 미국 달러화에 대한 원화 가치 상승 압력에 저항하기 위해 올해 상반기에 계속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한국 외환 당국이 환율 조작에 대한 투명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미국은 우리나라와 함께 대미 무역 흑자를 기록해온 일본과 중국에 대해선 사실상 면죄부를 줬다. 지난 8월 중국이 위안화 환율 평가절하에 나섰을 때 미국 재무부는 "경기 둔화를 막기 위한 조치로 이해한다"고 논평했다.

한때 1달러당 75엔대까지 떨어졌던 일본 엔화가 130엔대까지 상승(엔화 가치 하락)한 것에 대해서도 미국 정부는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을 막기 위한 일본 정부의 불가피한 대응"이라고 옹호하고 있다.

외환 당국 관계자는 "중국은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미국도 함부로 공격하기 힘든 대마불사(大馬不死) 국가가 됐고, 일본은 미국과 똑같이 양적 완화(중앙은행이 채권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시중에 돈을 푸는 것) 정책으로 엔화 가치를 떨어뜨렸기 때문에 미국도 할 말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과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면죄부를 받은 상황에서 미국이 공격할 수 있는 나라는 아시아에서 한국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환율 외교의 실패"

사실 우리 입장에선 미국의 환율 조작 주장이 억울한 측면이 많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최근 2~3년간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은 1달러당 1100원 선 안팎에서 큰 변동 없이 유지돼 왔다. 외환 당국 입장에서 무리하게 시장에 개입할 필요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또 최근 5년간 주요 국가 통화들은 달러 대비 가치가 크게 하락한 반면, 원화 가치는 거의 변동이 없었다. 2010년 10월 20일 1달러당 1126.9원이었던 원화 환율은 20일 현재 1121원 수준에 거래됐다. 반면 일본 엔화 가치는 폭락에 가까울 만큼 크게 떨어졌다. 같은 기간 1달러당 엔화 환율은 81엔에서 119엔으로 46% 상승(엔화 가치 하락)했다. 중국 위안화 환율은 같은 기간 1달러당 6.64위안에서 6.36위안으로 4.3% 하락(위안화 가치 상승)했지만, 미국을 상대로 지난해에만 3432억달러의 무역 흑자를 낸 중국의 경제력을 감안하면 절상폭은 크지 않았다는 평가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대미 무역 흑자는 237억달러로, 중국의 7% 수준이었다.

전문가들은 "고장 난 녹음기처럼 주기적으로 근거 없이 '한국은 환율 조작국'이라고 평가하는 미국도 문제지만,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써도 이를 적극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외환 당국의 불감증도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경제학)는 "여러 자료를 종합해볼 때 '한국 환율이 저평가돼 있고 한국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한다'는 미국의 인식은 부당하고 말이 안 된다"면서 "미국이 중국과 일본의 환율정책은 묵인하면서도 한국만 문제 삼는다는 것은 결국 우리 외환 당국이 환율 외교 분야에서 제 기능을 못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배상근 한국경제연구원 부원장은 "환율 조작국이란 누명을 쓰면 환율이 급변동해도 외환 당국이 미국 눈치 때문에 적극 대응을 할 수 없다"면서 "외환 당국이 무사안일에서 벗어나 우리 경제와 외환시장 상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미국을 설득하는 노력을 벌여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