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업체 ‘델’의 마이크 델 창업자 겸 CEO

지난 12일 세계 IT(정보기술) 업계에서는 기록적인 인수합병이 이뤄졌다. 세계 3위의 PC 업체인 미국 델(Dell)이 데이터 저장장치(스토리지) 1위 업체인 EMC를 670억달러(약 77조원)에 인수한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는 싱가포르의 반도체 기업 아바고가 미국의 통신반도체 기업 브로드컴을 370억달러에 인수한 것을 넘어서는 사상 최대 규모다.

업계는 이번 인수를 성사시킨 주인공이 델이라는 점에 더욱 놀랐다. 델은 2000년대 초반까지 온라인 전용 판매 방식을 전면 도입해 세계 PC 시장을 선도했던 업체였다. 하지만 스마트폰·태블릿PC 등의 등장으로 PC 수요가 줄어든 데 이어 중국 레노버 등 저가 PC 업체들이 등장하면서 성장세가 꺾였다. 주가가 계속 추락하자 창업자인 마이클 델은 2013년 사모펀드(PEF)와 손잡고 델의 주식을 모두 인수한 뒤 스스로 상장을 폐지해 버렸다. 그러자 다들 "델은 이제 끝났다"고 했다. 그랬던 델이 2년 만에 EMC를 인수하며 다시 화제의 중심에 섰다. 그동안 델에 어떤 일이 생긴 것일까. 그리고 델이 EMC를 거액에 사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체질 변화하는 델

시장조사업체 IDC와 가트너 등에 따르면 델은 작년 PC 시장에서 273억달러, 서버 시장에서 89억달러의 매출을 거뒀다. 델은 PC 업체로 유명하지만 기업용 서버 분야에서도 PC 매출의 4분의 1 가까이 벌어들인다. 델은 휼렛패커드(HP)에 이어 세계 서버 시장 2위 업체다. 기업용 솔루션·서비스 사업도 상당한 규모다.

이는 델이 일반 소비자 시장에서 B2B(기업 간 거래) 기업으로 체질 개선에 나서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델은 상장 폐지에 나서기 전부터 이런 추세를 보여왔다. 기업용 솔루션·서비스 매출 비중이 2008년(회계연도 기준) 23%에서 2012년에는 29%까지 늘었다. 2012년에는 델 소프트웨어 그룹을 신설하는 등 B2B 시장 공략을 강화하고 있다.

델이 사업 모델을 바꾸는 이유는 주력 사업이던 PC 시장이 스마트폰에 밀려 쪼그라들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세계 PC 시장은 작년보다 4.5% 줄어든 3억대 규모로 추산된다. 마이크로소프트(MS)가 새 운영체제 '윈도10'을 공개하면서 무료 업그레이드를 진행한 것도 PC 업체에는 악재다. 소비자들이 PC를 교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감안한 마이클 델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안정적인 수익을 낼 수 있는 B2B 위주로 회사 체질을 바꿔가고 있다.

왜 EMC를 인수했나

델과 EMC는 이번 합병으로 서로에게 모자라는 부분을 채운 것으로 평가된다. 델이 기업용 서버와 네트워크 시장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는 상황에서 EMC의 데이터 저장장치까지 확보하면 기업용 IT 시장의 3대 요소를 모두 채운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HP, IBM과 어깨를 겨룰 만한 B2B 기업으로 성장할 수도 있다. 또 EMC의 자(子)회사인 VM웨어는 클라우드 서비스용 소프트웨어에 강점을 가진 회사다. 클라우드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의미다. 마이클 델 CEO는 "이번 합병을 통해 소프트웨어에 기반한 데이터센터, 클라우드, 모바일, 보안 등 차세대 IT전략에서 큰 성공을 이룰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EMC의 경쟁사인 넷앱의 조지 쿠리안 CEO는 "고객의 필요가 아니라 낡은 사업모델을 떠받치기 위한 행보"라고 평했다. 어려움을 겪는 두 회사가 합쳤다는 것이다. 실제로 PC 사업에서 고전하는 델과 마찬가지로 EMC는 클라우드(온라인 저장공간) 서비스의 등장 이후 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델의 이번 행보는 HP와 극명하게 비교된다. HP는 작년 10월 회사를 PC·프린터 사업부와 기업용 PC, 소프트웨어 사업부로 쪼개는 분사 계획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조직을 슬림화하고 각각 사업 분야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반면 델은 EMC를 인수하면서 초대형 기업으로 컸다. HP의 멕 휘트먼 CEO는 "두 회사가 큰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