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스러운 목련 꽃봉오리가 5분 간격으로 벌어졌다 오므라들다를 반복한다. 손목시계 숫자판(다이얼) 위에서다. 목련은 꿀벌이 지구상에 나타나기 전 홀로 수백만년을 꿋꿋이 견뎌낸 강인한 꽃. 시계가 고장 나 멈추지 않는 한 이 분홍 꽃은 영원히 피었다 지기를 되풀이할 것이다. 눈을 사로잡는 시계는 또 있다. 별을 따라 고대 실크로드의 중심지 사마르칸트에서 물의 도시 베네치아로 먼 길 떠나는 상인과 낙타를 돋을새김한 바탕에 시침과 초침을 얹은 시계, 가죽끈 대신 링 위에 투명한 다이아몬드를 박아 언뜻 보석 팔찌처럼 보이는 시계도 눈길을 끈다.

①부채의 겉면을 옆으로 밀면 숨어 있던 숫자판이 드러난다. ②숫자판 위에 보라색 자수정 아이비 잎을 수놓아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③백금 틀에 다이아몬드를 박아 넣어 손목시계가 아니라 화려한 보석 팔찌처럼 보인다.

'남자들의 전유물'인 줄 알았던 손목시계가 여심(女心)을 향한 야망을 대놓고 드러내기 시작했다. 1969년 닐 암스트롱과 함께 달 표면을 걸은 버즈 올드린이 손목에 차고 있던 문(Moon)워치, 1만m 해저에서도 재깍재깍 끄떡없이 돌아가는 잠수사 시계 다이버워치 등 최첨단·초정밀 과학기술을 추구하던 손목시계가 여인들의 심미안을 겨냥하고 나선 것이다. '이게 시계인가?' 싶을 만큼 독특한 디자인에다, 동서양의 신화와 야사가 담긴 '이야기'가 숫자판에 펼쳐진다.

200년 전만 해도 여성은 시간을 알 필요도 없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시계는 '평생 한 개만 소유하는 것'이란 인식도 강했다. 그런데 1980년대 초 값싸고 정확한 전자시계가 나타나면서 시계는 취향과 유행에 맞춰 고르고 바꿀 수 있는 패션 품목이 됐다. 2000년대 들어 언제 어디서든 시간을 편리하게 확인할 수 있는 스마트폰의 등장은 시계, 특히 고급 시계에 희소한 아름다움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지름이 4㎝에 불과한 동그란 숫자판에 잘게 부순 달걀 껍데기를 촘촘히 박아넣어 사막의 왕 매의 형상을 만들고 색을 입힌다. 시간을 알려주는 숫자판이 예술 작품을 담는 캔버스가 된 셈이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색깔과 소재다. 까만색·회색·남색 일색이던 남성 손목시계에 비해 여성 손목시계는 붉은색·분홍색은 물론이고 오렌지색·노란색·민트색 등 밝고 화사한 색상으로 알록달록하게 물들고 있다. 서로 크기가 다른 다이아몬드를 나란히 둬 은은하게 반짝이는 스노 세팅 기법, 달걀 껍데기를 잘게 부숴 원하는 형상을 만들고 그 위에 색을 입히는 에그셸 마르퀘트리 기법, 숫자판 표면에 에나멜을 입히고 수차례 뜨거운 열을 가해 본연의 색을 진하게 발현하는 에나멜링 기법 등 중세부터 장인들 사이에서 도제식으로 전해 내려온 갖가지 경이로운 기술이 더해져 예술 작품에 버금가는 가치를 뽐낸다. 투명한 숫자판을 달아 시계 내부의 작동 장치가 움직이는 모습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한 디자인도 눈길을 끈다.

"여성들은 톱니바퀴나 태엽, 덮개 같은 시계의 복잡한 기능에 관심이 없어요. '50시간의 파워 리저브를 자랑한다'고 말하면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표정을 짓죠. 하지만 시계 자체가 갖고 있는 스토리를 들려주면 관심을 기울여요. 가슴을 뛰게 하는 시계가 필요한 이유죠." 지난 1일 중국 홍콩에서 열린 제3회 아시아 고급 시계 박람회에서 만난 로저드뷔 CEO 장 마크 폰트로이는 "패션에서 샤넬 같은 명품 브랜드가 선보이는 오트쿠튀르(고급 맞춤복) 컬렉션을 떠올리면 된다. 기술만으론 모자라고 예술적 가치를 쏟아부어 남과 다른 시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고귀한 그림을 수집하는 컬렉터처럼 예쁘고 독특한 시계를 소장해 후손에게 물려주려는 트렌드도 맞물렸다. 에나멜을 뒤덮은 숫자판에 다이아몬드로 날개 활짝 펼친 백조를 조각한 시계는 한 점 그림 같다. 무늬마다 새의 깃털을 붙여 넣은 시계도 있다. 까르띠에의 마케팅·커뮤니케이션 디렉터 아르노 카레즈는 "시계는 따로 보관 창고가 필요 없는 예술 작품"이라며 "우아한 시계는 우리를 꿈꾸게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