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의 네트워크 장비 회사인 시스코가 급변하고 있다. 20년간 시스코를 이끌었던 존 체임버스(66) 최고경영자(CEO)가 지난 7월 이사회 의장으로 물러나고, 40대의 척 로빈스(49) 글로벌 사업총괄 수석부사장이 새 CEO로 선임됐기 때문이다.

그동안 시스코는 컴퓨터를 인터넷에 연결해주는 장치인 스위치·라우터 등을 생산하면서 세계 인터넷 산업의 '핏줄' 같은 역할을 해왔다. 한때 세계 PC 중 80%가 시스코의 장비를 거쳐 인터넷에 접속할 정도였다. 2000년 초반 시스코는 시가총액 5000억달러(약 583조원)를 기록하면서 세계 1위 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 스마트폰과 모바일 시대가 도래하면서 시스코의 위치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현재 시스코의 시가총액은 1365억달러(약 159조원·5일 기준)까지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취임한 척 로빈스 신임 CEO는 5일(현지 시각) 앞으로 시스코의 사업 방향을 네트워크 장비에서 사물인터넷(IoT)으로 전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인터넷 넘어 사물인터넷으로

로빈스 CEO는 이날 미국 캘리포니아주(州) 새너제이(San Jose)에 있는 시스코 본사에서 글로벌 미디어 취재진 50여명을 초청한 가운데 '글로벌 에디터 콘퍼런스 2015'를 열었다. 그는 기조연설을 통해 "지금 IT(정보기술) 산업은 마치 (닷컴 열풍이 불기 시작한) 1990년대를 보는 것 같다"며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빠르게, 빠르게, 빠르게(faster, faster, faster) 움직여야 한다"며 변화를 강조했다. 그는 사물인터넷 기술을 바탕으로 클라우드(가상 서버), 보안, 데이터 분야에 집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시스코 척 로빈스 신임 최고경영자(CEO)는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빠르게 변화해야 한다”며 “앞으로 사물인터넷 사업을 강화할 것”이라고 밝혔다.

시스코가 사물인터넷으로의 전환을 선언한 이유는 삼성전자·애플·구글 등 주요 IT업체들이 이 분야에 집중 투자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빈스 CEO는 "시스코는 단순히 기기를 연결하는 것을 넘어 사람, 건물, 기기 등을 모두 연결하는 만물 인터넷(Internet of Everything)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한국의 인천 송도를 비롯해 유럽, 미국, 인도 등에 스마트시티 센터를 짓고 도시 전체를 하나의 인터넷망으로 연결해 관리하는 서비스를 준비 중이다.

예를 들어 덴마크 코펜하겐에서는 도시용 와이파이(WiFi·무선랜) 기술을 이용해 가로등을 모두 연결해 중앙관제센터에서 한 번에 관리할 수 있도록 했다. 로빈스 CEO는 "앞으로 2019년까지 각 기기 간에 오가는 데이터 통신량(트래픽)은 지금의 3배로 늘어날 것"이라며 "모든 기기가 연결되고, 여기서 모두 데이터를 쏟아내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기존 서버 컴퓨터로는 이처럼 사물인터넷 시대에 폭증하는 데이터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클라우드·보안·데이터 분석을 강화하겠다고 그는 밝혔다.

B2B 사업 강화 "누구와도 손 잡는다"

로빈스 CEO는 1997년 시스코에 합류한 뒤 전 세계 영업 및 파트너십(제휴) 업무를 맡아왔다. B2B(기업 간 거래) 전문가답게 그는 이날 미국 GE, 일본 화낙 등 글로벌 제조업체들과 협력해 사물인터넷 기술을 적용한 스마트공장 서비스를 제공 중이라고 밝혔다. 각 공장에서 가동되는 기계·로봇의 데이터를 모아 분석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가동 시간을 최적화하는 것이다.

화낙의 경우 현재까지 총 25만대가 넘는 생산용 로봇을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해 관리하면서 작업 지연 시간을 줄이고 있다. 과거에는 단순히 네트워크 장비나 통신용 반도체 등을 납품하는 수준이었다면, 앞으로는 장비와 소프트웨어를 묶어서 사물인터넷용 솔루션을 판매하는 식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또 애플과 기업용 모바일 기기 시장을 함께 공략하기로 했고, 삼성전자와도 끈끈한 유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날 행사에는 체임버스 이사회 의장도 참석했다. 그는 "이제 나는 (CEO가 아니라) 스태프(staff·참모)"라면서 "앞으로 중국을 비롯해 해외에서 사업 영역을 확장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체임버스 의장은 "삼성전자와 기존의 특허 공유, 통신용 칩 공급을 넘어서 다른 분야에서도 협력을 강화할 것"이라며 "사물인터넷 사업도 충분히 협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IoT)

사람의 개입 없이도 인터넷에 연결된 기기들이 센서 등을 통해 수집한 정보를 서로 주고받으며 자동으로 작동하는 기술. 사람이 집에 들어오면 현관문이 신호를 보내 전등과 TV가 알아서 켜지고, 오븐이 저녁 요리를 시작하는 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