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자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 | 560쪽 | 1만4400원

아모레퍼시픽의 전신 태평양 그룹은 거대기업이었다. 한때 계열사를 25개나 거느렸다.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증권사, 생명보험사, 프로야구단, 제약사 등 발을 뻗지 않은 곳이 드물었다. 몸집이 불어나니 잡음이 커졌다. 노조 문제가 불거졌고, 자금 사정은 빠듯해졌다.

1991년 5월 어느 날. 창업자 고(故) 장원 서성환(1923~2003) 선대회장과 서경배 당시 태평양 기획조정실 상무가 마주 앉았다. 부자(父子) 앞의 책상 위에는 고풍스러운 다기 세트가 놓였다. 서 회장이 생각에 잠길 때마다 함께했던 다기였다.

위기의 벼랑 끝에 선 두 부자 경영인은 녹차를 마주하고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그룹의 미래에 대한 생각이 오갔다. 지금은 아모레퍼시픽 그룹의 총수인 서경배 회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1991년의 파업이 태평양 역사상 최대의 위기이자 전환점이었습니다. 자금 사정이 어려웠기에 정말 회사가 망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게 모든 걸 바꿨으니까요. 회장님과 저는 '만약 우리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고 고민했습니다. 그때 회장님은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을 만들겠다'고 하셨습니다. 화장품 외길은 당신의 꿈이고 삶 자체여서 화장품 없는 자신의 인생은 아무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길이 보였고, 할 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뒤로 그룹은 계열사를 정리하고 '화장품 외길'로 돌아왔다. 그 덕에 1997년 한국을 덮친 경제위기도 비켜갔다. 이제는 'K뷰티'의 선두 주자로 우뚝 섰다. 세계적인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2015년 아모레퍼시픽을 세계의 창의적인 100대 기업 중 한 곳으로 뽑았다. 화장품 한우물을 팠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 책은 아모레퍼시픽이 2015년 창립 70주년을 맞아 펴낸 서성환 선대회장의 평전이다. 창업자의 이야기이자, 이제는 찾아보기 어려운 ‘현대적 개성상인’의 경영 일지다.

아모레퍼시픽 그룹의 모태는 창성상점이었다. 가게를 처음 연 윤독정 여사는 아들이 10대였을 때부터 사업을 가르쳤다. 서성환 선대회장은 개성에서 서울 남대문 시장까지 자전거를 타고 180리(약 70km) 길을 가서 화장품 원료를 사왔다. 그러면서 '사람의 신뢰를 얻는 법' 같은 업(業)의 본질을 배웠다.

그는 태평양이 성장궤도에 들어서자마자 ‘어머니의 힘’을 다시 경영에 적용했다. 1953년 휴전 이후 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여성들은 가족 생계를 책임져야 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삯바느질, 식모살이, 교환수, 버스 안내원 등이 고작이었다. 서성환 선대회장은 방문 판매제를 도입해 여성들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품질과의 타협은 없었다. 그는 연구개발(R&D)에 남다른 공을 들였다. 1960년대부터 시작했던 인삼 연구는 1997년 세계적 명성의 한방 화장품 ‘설화수’로 이어졌다. 이 제품은 현재 중국인 관광객들이 한국에 오면 꼭 사야 하는 제품으로 꼽힌다. 직원들은 “사장님이 가장 행복해 보일 때는 연구실이 커질 때”라고 회고했다.

서성환 회장이 화장품 외에 유일하게 애정을 쏟은 것이 녹차였다. 그는 쇠퇴해가는 우리 차 문화를 안타깝게 여겼다. 사재를 털어 제주와 호남에 차 재배단지를 일구고 설록차를 생산했다. 2001년 제주에 문을 연 ‘오설록 티뮤지엄’은 아버지를 향한 서경배 회장의 선물이었다.

서경배 회장은 책에서 "아버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분의 삶에서 행복을 떠올린다"며 "어머니의 깊은 지혜를 헤아려 개성에서 서울까지 부지런히 자전거 페달을 밟았고,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소중한 믿음으로 아낌없이 자신의 마음을 나누었다. 물건을 파는 일은 진심을 파는 일이요, 마음을 사는 일이라 굳게 믿었던 큰 사람"이라고 말했다.

국내 기업의 평균 업력은 22년에 불과하다. 해방 이후 70년 업력을 이어온 아모레퍼시픽은 그런 점에서 부러움을 살 만하다. 하지만 정작 그 이면의 경영 철학과 다사다난했던 역사는 접할 기회가 없었다. 이 책은 그 공백을 상당 부분 메운다.

서성환 회장은 2003년 1월 9일 눈을 감았다. 그 후로도 서경배 회장 체제의 아모레퍼시픽은 선대의 기업 철학을 계승 확장해가는 듯 보인다. 대기업 경영권 승계 과정에 대한 국민의 시선이 곱지 않은 요즘, 가업의 성공적인 계승은 재산 이어받기가 아닌 기업 정신의 상속임을 이 책은 웅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