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싱클레어 지음|이수경, 이지은 옮김|민음사|440쪽|1만9000원

2000년대 중반 소액금융(microfinance)은 전 세계적인 각광을 받았다. 하지만 10여 년이 흐른 지금 소액금융은 빈 껍데기만 남았다. 소액금융 시장이 700억달러 규모로 커졌지만, 빈곤 종식이라는 소액금융의 이상은 더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책은 이런 소액금융 업계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21세기형 고리대금업이라는 부제가 어울릴 정도로 소액금융 업계는 서민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절벽으로 내몰고 있다. 소액금융과 관련된 여러 기관과 단체에서 활동한 저자의 경력이 고발의 당위성과 현장감을 살려준다.

하지만 책을 읽는 동안 가시지 않는 의문이 있다. 저자가 지적한 소액금융의 일탈을 소액금융의 '배신'으로 봐야 할까. 아니면 인간 본성의 자연스러운 발로라고 생각해야 할까.

소액금융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기부한 돈이 빈민의 한 끼 식사가 되는 것보다 자립의 기반이 되기를 원한다. 빈민들에게 물고기를 주기보다 낚시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올바르다고 믿는 것이다.

서민금융은 빈민들에게 대출을 통해 낚시하는 법을 가르치겠다고 홍보했다. 소액금융 시장이 단기간에 700억달러의 거대 금융시장으로 성장한 이유다. 사람들은 소액금융이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믿었다.

문제는 정치적으로 올바르다고 여겨지는 대부분의 경제적인 현상들이 그런 것처럼, 소액금융도 현실에서는 굴절되고 만다는 사실이다. 소액금융의 이상이 인간의 본성과 충돌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지적처럼 소액금융 대출금이 ‘재봉틀이나 염소처럼 생산적인 용도’에 쓰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신 ‘텔레비전을 사거나 다른 대출금을 갚거나 일반적인 소비 활동'을 하는 데 사용된다.

낚시하는 법을 가르치겠다던 소액금융 업체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뒷짐을 진다. 높은 이율이 보장되는 대출 사업을 포기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며 소액금융의 이상을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액금융 2.0을 통해 소액금융 시장에 들어간 엄청난 자금을 제대로 활용해 빈곤을 퇴치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존 퍼킨스의 말대로 저자 역시 마지막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저자의 희망대로 소액금융 2.0이 자리 잡을 수 있을까? 소액금융 1.0의 실패가 인간 본성에서 비롯했다면 2.0 역시 쉽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힘들게 낚시하는 법을 배우기보다는 물고기 먹는 것을 좋아한다. 고리대금업은 매춘과 함께 인간 문명의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은 몇 안 되는 산업이다.

그라민은행의 신화는 대출자들의 눈물겨운 사연에서 시작됐다. 그라민은행의 첫 번째 수혜자로 알려진 수피아 베굼은 22센트를 갚지 못해 어려움을 겪다가 그라민은행의 도움으로 어려움에서 벗어났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이후 수피아 베굼은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죽었고 그의 손자는 여전히 어렵게 살고 있다고 한다.

빈곤 퇴치가 금융의 힘으로만 해결될 수 있을까. 물음은 또다시 숙제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