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PC 모니터, 태블릿PC, 스마트폰, 거리의 대형 광고 화면까지. 일상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시각 정보를 영상으로 표현하는 디스플레이 장치를 만난다. 1990년대 두툼한 브라운관(CRT) 화면을 밀어내고 등장한 평평하고 얇은 디지털 액정화면에서 시작된 디스플레이의 진화는 SD(일반화질)와 HD(고화질)를 거쳐, 최근에는 가로 화소(畵素) 4000개를 의미하는 4K UHD(초고화질)도 모자라 8K까지 등장할 정도로 거침없는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디스플레이 진화의 원동력은 '좀 더 현실과 가까운 영상을 보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흑백 화면은 컬러 화면으로, 흐릿한 화면은 좀 더 명확하고 또렷한 화면으로 발전해왔다. 손톱보다도 작은 1㎠ 넓이 화면에 7만6000여개의 화소가 들어찬 초고화질(UHD) 영상은 드디어 사람의 눈이 실물과 구분하지 못할 정도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다시 화소를 더 늘린 8K 화면으로의 발전은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디스플레이 기술이 극한으로 치달으면서 현실에 대한 인간의 시각적 경험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접어들고 있다.

지난해 독일 베를린‘ IFA 2014’에서 LG전자가 선보인 98인치 8K TV. 100인치급의 초대형 화면에 UHD(초고화질) TV의 4배 화질인 8K 화질을 구현하는 것이 가능해지 면서 디지털 디스플레이를 통한 인간의 시각적 경험은 화면 속 그림을 현실이라고 착각하는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정보의 전달'에서 '현실의 복제'로

처음 흑백 브라운관이 보여준 영상은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흐릿한 그림자 수준이었다. 총 500여개의 줄로 이뤄진 화면의 화질은 평면 SD(일반화질) 화면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글이나 말로 설명한 장면을 머릿속으로 상상할 필요 없이, 흑백이나마 현장에서 벌어지는 장면을 시각적으로 볼 수 있게 됐다는 의미에서 흑백 브라운관의 등장은 사람들이 정보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미디어 이론가 마셜 맥루한은 이를 "기호로 추상화(압축)된 정보가 아닌, 눈으로 보는 시각 정보를 그대로 전달하게 됐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해상도가 낮은 화면은 우리가 눈으로 직접 보고 경험하는 현실의 극히 일부밖에는 전달하지 못한다. '실감이 안 나는' 불완전(不完全)한 정보다. 옛 금성사(金星社) 출신의 디스플레이 업계 관계자는 "지금 생각하면 1980년대 컬러 TV와 VTR의 시대까지 우리가 보는 영상은 '현실감'을 논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면서 "그래도 '살아있는 듯 생생한 화면'이라는 문구를 넣어 광고를 했다"고 말했다.

1990년대에 HD(고화질) 화면에 대한 표준이 제정되고 TFT-LCD(박막트랜지스터 액정화면)와 PDP(플라스마 디스플레이 패널) 등 HD급 화질을 실현할 수 있는 기술이 무르익었다. 디스플레이는 인간의 눈을 시험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1990년대에 일본에서 '하이비전'이라고 하는 HD 화면을 처음 보고 그 선명하고 실감나는 영상에 충격받았던 일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HD 화면의 야구 경기 중계를 보는데 일반 컬러TV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야구공이며, 선수들의 표정이 제대로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는 "진짜 야구장에 앉아서 보는 듯한 느낌에 놀라면서도 '과연 이런 기술이 보편화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지금은 집집마다 HD급 이상의 LCD TV를 갖추게 됐으니 격세지감"이라고 말했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경험으로

가로로 1920화소, 세로로 1080화소 이상을 갖는 풀HD급 이상에선 야구공은 더 이상 화면 속의 '작은 점'이 아니다. 공의 실밥 방향을 구분할 수 있을 만큼 또렷하게 보인다. TV 드라마에 출연하는 탤런트들의 얼굴에서 잔주름과 각질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가로 4000여개의 화소를 의미하는 4K UHD 시대에 이르면 실밥의 방향은 물론 실밥 하나하나까지 눈에 들어오게 된다. 이 정도면 디스플레이가 현실을 '복제'해 보여주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맨눈으로 보는 실제 현실과 화면을 통해 보는 현실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된 것이다. 지난해 삼성전자가 UHD 모니터 제품을 출시한 뒤 이 제품의 화질을 자랑하기 위해 했던 실험이 이를 증명하는 대표적 사례다.

작은 화단 앞에 뒤가 훤히 보이도록 틀만 갖다 놓은 모형 모니터 4대를 놓고, 그 사이에 실제 UHD 모니터 한 대를 갖다 놓았다. 그리고 UHD 모니터 뒤에 카메라를 달아 모니터가 가린 뒷부분의 모습을 화면에 나오게 했다. 삼성전자는 "프로게이머 3명과 국가대표 사격 선수, 양궁 선수, 영상의학과 전문의, 시력이 좋다는 몽골의 유목민 등 눈이 날카로운 평가자 7명이 테스트를 했지만 단 한 명도 모니터 화면을 골라내지 못했다"고 밝혔다. 어느 것이 카메라를 통해 보는 화면인지를 구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최근 일본 샤프가 공개한 8K 디스플레이는 4K의 두 배인 가로 8000여개의 화소를 갖는다. 넓이는 길이의 제곱이므로, 전체 화소 수는 두 배가 아닌 네 배다. 즉 4K보다 4배의 선명함을 자랑하는 셈이다.

이미 4K 수준에서도 실물과 영상을 구분하지 못하는데, 굳이 8K를 만들어야 할까. 업계는 "100인치 급의 초대형 화면에서도 실물과 구분하기 힘들 만큼의 초고화질을 구현하기 위해 8K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4K 규격으로 만든 TV라도 화면이 확 커지면 선명함이 떨어진다. 커진 화면에 비례해 화소수를 늘려야 원하던 선명함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시야 전체에 초고화질 영상이 펼쳐지면서 (현실의 경험을 뛰어넘어) 지금 내 앞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느끼는 단계로 가게 된다는 것이 TV 업계의 설명이다.

인간의 뇌가 영상을 보는 동안 이를 실제 자기에게 벌어지는 일로 착각할 만큼 영상 속에 의식이 몰입되는 체험이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더 현실감 있는 영상'을 추구한 디스플레이 기술의 발전은 그 극한에 이르러 현실을 창조해내는 단계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