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방미(訪美)와 맞물려, 세계 3위 D램 업체인 미국 마이크론 인수설이 다시 거론되고 있다. 중국 칭화유니그룹은 지난 7월 마이크론에 전격적으로 인수 제안을 했다가 거절당했다. 이 회사는 중국 칭화대 산하의 국유 회사로 반도체 위탁 생산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 마이크론 주가가 계속 하락해 중국 측의 인수 조건이 점점 매력적으로 변하고 있다. 칭화유니그룹이 첫 제안가보다 30% 이상 높은 가격을 제시했다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중국이 마이크론을 인수해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 진출할 경우 국내 반도체 업계에도 큰 위협이 될 전망이다.

◇미국 반도체 회사 마이크론, 중국에 넘어가나

지난 7월 칭화유니그룹이 마이크론에 제안한 인수가격은 1주당 21달러였다. 당시 마이크론의 주가(17.61달러) 대비 19.3%의 인수 프리미엄을 얹은 가격이었다. 총 인수 금액은 230억달러(약 26조원)나 됐다.

마이크론은 이를 단칼에 거절했다. 3개월 평균주가인 29달러에 비해 턱없이 싼 가격이라는 이유였다. "마이크론의 첨단 반도체 기술이 중국에 유출돼서는 안 된다"는 미국내 여론과 정부의 부정적인 반응도 작용했다.

하지만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20일 "매각 거부 결정의 배경이 된 두 가지 이유 모두가 갈수록 설득력을 잃고 있다"고 보도했다. 마이크론 주가는 지난 21일 15.5달러로 마감했다. 첫 인수 제안가(21달러)와 격차가 35%까지 벌어진 것이다. FT는 "(현재 주가와 비교하면) 7월 당시 칭화유니그룹이 제안했던 인수가격이 싸지 않아 보이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마이크론의 기술력에 대한 회의론도 고개를 들고 있다. 인수설로 홍역을 치른 마이크론은 지난달 "고부가가치 메모리 개발을 위해 내년 투자를 올해보다 50% 이상 늘어난 56억달러까지 높이겠다"고 발표했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와 미세공정 격차를 줄여, 뒤처진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차원이다.

증시와 투자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투자를 그렇게 늘렸다간 현금 유동성이 바닥날 것"이라며 '주식 매도' 의견을 고수했다. FT는 "마이크론의 기술이 더 이상 첨단이 아니라 널리 쓰이는 범용 기술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며 "기술 안보라는 명분으로 마이크론 매각을 막기가 점점 어려워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최근 중국 반도체 업계를 탐방한 KTB증권 진성혜 애널리스트에 따르면, 칭화유니그룹은 처음 제시한 가격보다 30~40% 높은 가격을 마이크론에 제시했다. 그는 "마이크론 주주들의 향후 반응을 주시해야 할 것"이라며 "칭화유니그룹은 중국개발은행과 약 200억위안(31억달러) 투자펀드까지 조성했기 때문에 자금 여력도 충분하다"고 분석했다.

◇안보가 매각 막을 명분 못돼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 그리고 일본 도시바가 전체 시장의 90%를 나눠 먹는 과점(寡占) 체제다. 중국은 전 세계 반도체의 55.6%를 소비하지만, 그 소비량의 90%를 수입에 의존한다. 중국은 이 같은 구도를 깨고 자국 주도로 시장을 재편하려는 열망이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반도체 업계는 메모리 반도체 최강인 한국 업체들에 대해서도 '전략적 제휴를 바란다'는 뜻을 직·간접적으로 표시하고 있다. 이에 선뜻 응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 기업들의 고민이다. 높은 마진을 내는 과점 시장에 신규 경쟁자를 만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마이크론의 예에서 보듯, '메모리 분야에 반드시 진출한다'는 중국 정부의 의지는 위협적이다. 중국 정부는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2020년까지 3500억위안(약 65조원) 규모의 국부펀드를 조성해 집중 투자할 계획이다. 미국 반도체공업협회(SIA)에 따르면, 현재까지 조성된 펀드 규모만도 220억달러에 이른다.

이 돈은 중국 반도체 업체에 빠르게 유입되고 있다. 그 한 줄기가 마이크론 인수 시도에 쓰일 가능성이 크다.

중국 반도체 업계는 마이크론 인수를 시도하는 동시에 다양한 형태로 메모리 시장 진출을 노리고 있다. 세계 5위권 LCD(액정디스플레이) 업체인 BOE는 올해 반도체 사업부를 신설하고 일본의 메모리 업체였던 엘피다(현재는 마이크론에 피인수) 출신 인력을 대거 영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유일의 메모리 위탁가공 업체인 XMC는 인텔 출신 중국계 미국인 사이먼 양의 진두지휘 아래 미국 반도체 업체 스팬션과 첨단 메모리 제품인 '3D(3차원) 낸드플래시'를 공동 개발 중이다. 중국 최대의 반도체 위탁가공 업체 SMIC도 메모리 진출설이 계속 나오고 있다.

중국의 자체적인 기술 축적이 여의치 않을 경우, 마이크론에 대한 인수 시도는 더욱 거세질 수밖에 없다. 이세철 NH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마이크론이 당장 중국에 인수될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면서도 "마이크론이 앞으로도 계속 경쟁력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미국으로선 중국 기업과 조인트벤처(합작사) 형태로 협력하는 형태까지 막을 명분은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중국은 그런 형태의 협력을 이미 미국 거대 반도체 업체들로부터 끌어내고 있다. 인텔·퀄컴 등의 대(對)중국 투자와 협력이 갈수록 늘고 있는 것이다. 인텔만 해도 지난해 칭화유니그룹 계열사에 15억달러를 투자했고 이달에는 8개 중국 벤처 업체에 6700만달러를 투자했다. 중국시장을 노린 측면도 있지만, 자국 기업의 기술 습득을 노린 중국 정부가 막대한 구매력을 이용해 보이지 않게 압력을 가한 결과라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한국 메모리 반도체 업계로서는 마이크론이 경쟁력을 일정 정도 회복해 안정적인 과점 구조를 유지하는 게 최선이지만, 그게 마음대로 안 된다는 게 고민이다.

☞메모리 반도체

데이터 저장용으로 쓰이는 반도체로 D램과 낸드플래시가 대표 제품이다. D램(DRAM)은 ‘동적 임의접근 기억장치(Dynamic Random Access Memory)’의 약자로 컴퓨터가 각종 작업을 할 때 임시저장 장치로 쓰인다. 전원이 꺼지면 데이터가 사라지는 D램과 달리 낸드플래시는 한 번 저장한 데이터가 계속 보존되는 것이 특징이다. 낸드플래시는 스마트폰이나 디지털카메라의 저장 장치로 주로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