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clean) 디젤' 차량을 앞세워 올 상반기 판매량 기준 세계 1위 자동차 업체로 부상한 독일 폴크스바겐이 '디젤 엔진' 때문에 창사(創社) 이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폴크스바겐은 미국 환경 기준을 맞추기 위해 배기가스 배출 소프트웨어(SW)를 조작한 사실이 적발돼 이달 18일 미국 환경보호청(EPA)으로부터 48만2000여대의 디젤 차량에 대한 리콜 명령을 받았다. EPA는 향후 최대 180억달러(약 21조2400억원)의 벌금을 부과할 방침이다.

폴크스바겐


폴크스바겐 주가는 21일 하루에만 18.6% 떨어지며 7년 만에 최대 하락 폭을 기록했다. 하루 만에 시가총액 가운데 141억유로(약 18조5746억원)가 사라진 것이다.

빈터콘 폴크스바겐 회장이 공개 사과하고 디젤 차량의 미국 판매 중단을 밝혔지만, 사태는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미국 법무부가 형사소추를 위한 조사에 착수했고 독일 정부도 별도 조사에 나섰다.

파장은 유럽 자동차 업계 전반으로 확산돼 메르세데스 벤츠의 지주회사인 다임러와 BMW의 주가도 동반 하락했다.

◇세계 1위 자동차 기업의 '충격적 사기극'

폴크스바겐 그룹은 폴크스바겐, 아우디, 벤틀리, 부가티, 람보르기니, 포르셰 등 12개 브랜드를 보유한 대형 자동차 그룹이다. 올 상반기 전 세계에 504만대를 팔아 도요타(502만대)를 제친 업계 1위 회사다.

주범인 '2.0L TDI' 디젤 엔진은 폴크스바겐이 "고(高)연비·친(親)환경 디젤엔진"으로 대대적으로 선전해온 제품이다. 김필수 대림대 교수는 "TDI 엔진은 상당히 잘 만든 엔진"이라며 "폴크스바겐이 이 엔진을 탑재한 차량들로 글로벌 시장에서 약진해왔다"고 말했다.

폴크스바겐

폴크스바겐은 이 엔진으로 그동안 부진했던 미국 시장 공략에 나름 성공했지만 '희대(稀代)의 속임수'로 판명됐다. 차량 테스트 중에 배기가스 배출 억제 시스템을 가동하다가 일반 주행 중에는 억제 시스템이 꺼지도록 SW를 조작한 탓이다. 이 때문에 각종 호흡기 질환을 일으키는 대기오염물질인 질소산화물(Nox) 농도가 미국 환경기준보다 많게는40배를 초과했다.

이번 TDI 디젤 엔진의 문제점은 민간환경단체의 2년여에 걸친 추적 끝에 규명됐다. 비영리 환경단체인 '국제청정교통위원회(ICCT)'는 '최근 미국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여가는 유럽 디젤차가 정말로 환경에 무해한가'라는 의문을 갖고 조사를 시작했다. 연구팀은 실제 주행 후 배출가스를 측정한 결과, 폴크스바겐 차량이 도로 주행에서 기준치보다 40배 많은 오염물질을 뿜어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폴크스바겐은 지난 1년간 혐의를 부인해오다가 미 연방정부가 '차량 판매를 금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지난달에야 조작 사실을 시인했다. 폴크스바겐의 조작은 연비(燃比) 향상이 주 목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항구 산업연구원(KIET) 선임연구위원은 "배출가스 억제 시스템을 끄면 질소산화물 등 오염물질이 많이 배출되지만 연비나 파워 등이 월등히 좋아진다"며 "폴크스바겐이 세계 자동차 2위 시장인 미국 매출을 늘리기 위해 무리하다가 엄청난 윤리적 위반(違反)을 저질렀다"고 했다.

◇르노·푸조 등 다른 유럽 차도 '불똥'

뉴욕타임스와 파이낸셜타임스 등이 일제히 "근래 글로벌 자동차 산업에서 일어난 최대 사기극"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폴크스바겐은 신뢰도에 큰 타격을 받게 됐다. 올해 초 페르디난트 피에히 이사회 의장과의 파워 게임에서 승리해 이달 2일 CEO 계약이 연장된 마틴 빈터콘 폴크스바겐 회장의 리더십도 위기에 몰렸다.

이번 사태의 파장은 고연비·친환경 디젤 엔진을 주력으로 한 다른 유럽 업체들에도 미치고 있다. 독일의 다임러AG와 BMW, 프랑스의 르노와 PSA푸조시트로앵 등의 주가도 하락했다. 시그마르 가브리엘 독일 부총리는 "폴크스바겐과 독일 자동차 산업의 훌륭한 명성이 추락하지 않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

미국 시장에서 폴크스바겐과 점유율 다툼을 벌여온 현대·기아차는 반사이익이 예상된다. 현대차의 주가는 22일 전날 대비 3.14% 상승했다. 현대·기아차는 미국에 전량 가솔린 엔진 차량만 수출한다.

신정관 KB투자증권 연구원은 "이번 사태로 글로벌 시장에서 차량 배기가스에 대한 환경 규제가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