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옷 입은 배우들이 베르디 오페라처럼 '백성이여 일어나라'를 부르는 장엄한 피날레에서 명성황후 역을 맡은 주인공 신영숙(40)의 얼굴이 예사롭지 않았다. 오페라글라스를 들고 자세히 보니 얼굴 전체가 눈물로 범벅이 돼 있었다. "어머, 그걸 보셨어요?" 신영숙은 "연습할 땐 차분했는데, 막상 무대에 서 보니 순식간에 뭔가 강한 정서가 관객과 교감이 되더라"고 했다. 그건 한국인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한(恨)의 정서였을 것이다.

신영숙은“명성황후의 처절한 심정에 몰입하다 보니 죽는 장면에서 헛구역질이 나오더라”고 했다. 오른쪽 사진은 명성황후로 분장한 모습.

16년 전 신영숙의 뮤지컬 데뷔작이 바로 '명성황후'였다. 조연인 손탁 역으로 나왔다. 그에게 당시 주연이었던 이태원은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싶었던 우상이었다. 회식 때 연출가 윤호진에게 스물네 살 신영숙이 당차게 말했다. "저 언젠가 꼭 명성황후 할게요!" 세월이 흘러 그 꿈이 실현됐다. '명성황후' 20주년 기념 공연의 주인공을 맡게 된 것이다. 김소현과 더블캐스트로 나오는 그녀에 대해 윤호진은 "이태원 못지않은 파워를 보여줄 배우"라고 말한 적이 있다.

추계예대에서 성악을 전공한 신영숙은 탄탄한 가창력으로 팬들이 믿고 찾을 수 있게 하는 흔치 않은 뮤지컬 배우다. 7년 넘게 서울예술단에서 연기와 무용의 기초를 다진 노력파이기도 하다. '이(爾)'와 '캣츠'에서 주연을 맡으며 경력을 쌓았는데, 유럽을 배경으로 한 대형 뮤지컬이 많아지며 어느새 '마담 전문배우'가 됐다. '두 도시 이야기'의 마담 드파르지, '레베카'의 댄버스 부인, '팬텀'의 마담 카를로타…. "30대 초반부터 부인 역으로 나왔어요. 예쁜 여주인공보다는 에너지 넘치는 역에 더 어울렸나봐요."

그중 최고의 '부인'은 '모차르트!'의 발트슈테텐 남작 부인 역이었을 것이다. 주인공에게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라고 권하는 노래 '황금별'을 부른 뒤부터 초등학생부터 군인까지 수많은 팬들이 쓴 편지가 쇄도했고, 신영숙은 '황금별 여사'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부인'의 최상급은 아마 황후(皇后)가 아닐까. 꿈에 그리던 명성황후 역을 맡으며, 신영숙은 명성황후를 '사회의 편견을 깨고 자신의 길을 걸어간 여자 민자영'으로 해석했다. 강인함을 드러내는 저음과 아픔을 호소하는 고음을 수시로 넘나들다, 극이 끝나고 분장실에 가서도 울음을 멈추지 못한다. 내년 초에 개막하는 다음 작품에서 또 '부인' 역을 맡는 그는 "늘 진심을 담아 무대에 설 것"이라고 했다.

▷뮤지컬 '명성황후' 9월 10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02)2250-5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