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흔히 나를 보고 '개천에서 용 났다'고 말한다. 전남 강진 가난한 농군의 4남 4녀 막내아들로 태어나 이름 대면 알 만한 금융그룹의 수석부회장까지 올랐으니 그렇게 표현하는 듯하다. 뒤돌아보면 그 개천 참 험했던 듯하다. 뭐 하나 쉽게 내 맘과 같이 되는 게 없었고,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성실하고 진지하게 스스로 다그치며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권투로 치면 '큰 것 한 방'을 노리기보다는 쉼 없이 툭툭 잽(jab)을 날리며 상대를 끈질기게 공략하는 '아웃복서'(상대와 떨어져서 자기의 사정거리를 유지하며 주로 잽을 날리며 싸우는 타입의 복싱 선수)라고 해야 할까.

나는 가난한 집안 막내아들이었기에 책 한 권 제대로 못 사 보며 어렵게 공부했다. 학교 태권도부에서 태권도에 취미를 붙였는데 고등학교 때 태권도 시합에 나가 가슴을 다쳐 1년 휴학해야 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벌어진 1980년에는 대학 입학을 포기하고 친구들과 광주로 내려가서 거리로 나섰다. 뒤늦게 1981년 가을,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합격 통지서를 받았지만 입학도 전에 날아든 입영통지서에 학교 교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입대할 수밖에 없었다.

제대하고 뒤늦게 대학에 가서는 행정고시에 도전했다. 휴학하고 무등산 절에 들어가 내 나름대로 악이 받치게 책을 팠다. 결과는 '1차 합격 후 3년 내리 낙방'이었다. 이 시절 나는 좌절해 한동안 친구들과 연락을 끊고 숨어 살았다.

미래에셋 최현만 수석 부회장은 험난한 지난 시절을 ‘큰 것 한 방’이 아닌 ‘잽’을 날린다는 각오로 헤쳐왔다고 했다. 그는 “가난한 집안 막내아들로 태어나 책 한 권 제대로 못 사 보고 대학을 9년 만에 졸업했다. ‘작은 물줄기가 모이지 못하면 강이나 바다를 이룰 수 없다’는 뜻을 가슴에 새기며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지금 자리까지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9년 만에 졸업하고 증권사로 진로를 틀었다. 연애 중이던 아내의 영향이었다. 연애 시절, 아내는 치대에 다녔다. 아내 집에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장인·장모가 귀하고 똑똑한 딸을 나에게 주기 싫어한다는 티를 적나라하게 내셨다. 아내에게 격을 맞추려면 '증권맨' 정도는 돼야 한다는 오기가 생겼다. 당시엔 증권사 직원이 아주 잘나갔기 때문이다.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몰려들던 당시 증권사는 상경계열이 아니면 굳이 뽑으려 하지 않았다. 증권사들은 신입 사원을 뽑기 위해 경제·경영학과 사무실을 돌면서 입사 지원서를 구했다. "안 뽑으면 후회할 겁니다"라고 배짱 있게 던진 한마디가 맘에 들었는지, 1989년 한신증권(이후 동원증권·한국투자증권)이 나를 뽑았다.

가방끈도 배경도 없는 시골 출신 증권맨에게 직장 생활은 고단했다. 상사가 명문대 출신 동기들과 비교해 표나게 나를 차별했다. 잡무만 던져 주고 제대로 된 일을 안 줬다. 살아남는 길은 역시 내 방식대로 잽을 날리는 것밖에는 없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부지런함으로 경쟁력을 높이자고 스스로 다짐했다. 남보다 2시간 일찍 출근했고 잡무건 뭐건 성실하게 처리해 나갔다.

이렇게 몇 년을 보내니 대리가 됐고 대리 승진 1년 6개월 만인 1995년 서초지점 지점장으로 발령이 났다. 당시 대리에서 지점장으로 승진한 국내 최단 기록이라고 한다. 승진은 빨랐지만 워낙 '출발점'이 늦어 다른 지점장들을 따라잡기 위해선 역시 또 뛰어야 했다. 매일 오전 5시 증권사 보고서를 수거하기 위해 서울 명동의 증권빌딩으로 출동했다. 모든 증권사의 일간 보고서 핵심만을 모아 내 이름으로 된 일간 보고서를 만들었다. 이를 여의도 일대 금융사와 건설사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돌렸다. 매일 출근 도장을 찍는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6개월 뒤 본사 법인영업부도 단돈 1원을 유치하지 못했던 기업은행(당시 중소기업은행)이 나에게 자금을 맡기고 굴려보라고 했다. 증권맨이 된 후 맛본 의미 있는 첫 성공이었다.

그리고 1997년 6월, 증권사에서 함께 일했던 이때 나를 눈여겨본 박현주 회장(당시 동원증권 강남본부장 이사)의 권유로 미래에셋 창업에 합류했다. 이후 나의 경력은 창업한 미래에셋의 성장과 함께했고 2011년 말 수석부회장에 올라서 미래에셋증권과 미래에셋생명까지 큰 그림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다.

물론 창업 후에도 어려움은 이어졌다. 2012년 6월 미래에셋생명 수석부회장 취임 후엔 시장을 선점한 대형 보험사들과 경쟁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럴 땐 내 방식대로, 기존 보험 시장의 관행을 하나씩 하나씩 벗어던지자고 매일의 결심을 다잡았다. 그 결과인지 민원 평가 1위, 변액보험 수익률 1위 같은 의미 있는 성과가 나오고 있다.

내 책상 옆엔 명심보감 '권학(勸學)' 편에 있는 '부적소류무이성강해(不積小流無以成江海)'라는 글귀를 담은 큰 액자가 걸려 있다. '작은 물줄기가 모이지 못하면 강이나 바다를 이룰 수 없다'는 뜻이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큰 결과를 이룰 수 있다는 의미로 매일 마음속으로 되새기는 구절이다. 오늘도 나는 또 다른 잽을 준비한다. 인생은 한 방이 아닌, 매일의 작은 잽이 모이는 것 아닌가.

☞최현만 미래에셋 수석부회장은…

최현만(55) 미래에셋 수석부회장은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후 1989년 한신증권에 입사해 1995년 최연소 지점장으로 승진했다. 1997년 국내 1호 자산운용사인 미래에셋자산운용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이후 1999년 미래에셋벤처캐피탈 대표이사, 1999년 12월 출범한 미래에셋증권의 초대 CEO를 지냈다. 2012년 6월 미래에셋생명 수석부회장으로 취임한 후 ‘진심의 차이’(변액보험), ‘생활의 자신감’(종합 보장보험) 등 재치 있는 보험 이름을 만들고 수수료 구조를 개편하는 등 여러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는 평가다. 스스로 “직원 중매에 적극적인데 직원 특성과 취향을 잘 알아 ‘승률’이 꽤 높다”고 말할 정도로 직원들과 허심탄회하게 지내는 소탈한 스타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