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마을은 안 됩니다!” 얼마 전 어떤 분이 경주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잠깐 안동 하회마을을 들러서 오자고 했을 때 나도 모르게 ‘안 된다’고 외치고 말았다. 그 곳에 가면 얼마나 찬찬히 살펴볼 게 많은데, 고속도로에서 잠깐 나와서 둘러보고 갈 생각을 한단 말인가. 마치 독일에 출장 갔다가 비행기 대기 시간 동안 짬을 내어 인근의 프라하를 둘러보겠다는 심산 아닌가.

‘조선의 프라하’ 안동 하회마을

실제로 하회마을은 서애 유성룡 가문의 유서 깊은 한옥을 비롯해 그림 같은 자연환경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한국 전통의 보물창고다. 유성룡의 아버지 유중영이 살던 입암고택을 비롯해, 허목의 전서체 글씨 '충효당(忠孝堂)'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는 서애의 종택,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을 고즈넉이 바라볼 수 있는 겸암정사를 ‘관광하듯’ 둘러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곳의 백미는 역시 하회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병산서원(屛山書院)이다. 유성룡이 만들었고, 유성룡 부자가 배향된 이 곳은 서애의 생각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배롱나무 꽃이 만개한 서원 내삼문(內三門) 앞 계단에 앉아, 강 건너 병산(屛山)을 하염없이 바라보는데 문득 체코의 수도 프라하가 생각났다. “히틀러가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을 때 왜 좀 더 강하게 저항하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체코의 대통령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프라하의 찬란한 모습을 굽어볼 수 있는 집무실 창문을 활짝 열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싸우지 않은 이유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M. Thatcher 2003, 25).

안동의 병산서원은 조선시대 전형적인 서원 건축물로 1613년 건립됐다.

“너무도 아름다워서, 그 아름다움이 도시 자체에 해를 끼쳤다”는 마가렛 대처 영국 수상의 말처럼 프라하는 주변 열강들이 어떻게든 소유하려 했던 ‘유럽의 장미’였다.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도시였기에 2차 대전 때 독일군에 저항해 폭격당하느니 차라리 항복을, 20세기 말 동구권 민주화 혁명 때도 피 흘리지 않는 평화로운 민주화, 즉 ‘벨벳혁명’을 택했는지 모르겠다. 마치 하회마을의 아름다운 산천에서 자라난 서애가 그 누구보다도 평화를 사랑했고, 그래서 전쟁 종식을 위해 몸부림쳤던 것처럼.

하지만 유성룡의 운명은 아름다운 산천에서 평화롭게 자연을 벗하며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말처럼 “전란 속에 떠다니며 온갖 계책 자아내느라 흰 머리만 가득한” 삶을 살아야 했다(유성룡 1997[1] ‘청풍의 한벽루에 묵으면서’). 그는 “정치가에게 최고의 시험”인 전쟁을 치러내야 했고, 더군다나 전시(戰時) 재상으로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결정해야만 했다. 일단 그 길에 들어서면 돌이킬 수 없고 오로지 앞으로 나가야만 하는 하회마을의 서쪽 물가 부용대의 낭떠러지 길처럼(여기서 ‘서애(西厓)’라는 호가 나왔다) 그는 ‘전시 수상(戰時首相)’의 역할을 온 몸으로 감당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선조가 잃어버린 기회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유성룡>에서 서애는 끊임없이 고뇌하는 인간으로 그려졌다. 파상적인 반대 당파의 공격이야 정치세계에서 살아 남아야 하는 존재들의 숙명이기에 그러려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국왕 선조가 보인 사사롭고 우유부단하며 무책임하기까지 한 태도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즉위 초반 조야(朝野)의 신민들이 선조에게 거는 기대가 얼마나 컸던가. 병약하고 무기력했던 두 임금(인종과 명종)과 달리 선비들과 말이 통할 것 같았던 청년 군주 선조를 만나기 위해 율곡 이이는 물론이거니와, 권력에 대한 근본 불신을 가지고 있었던 퇴계까지도 상경 입궐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옥좌에 앉은 선조는 차츰 마음의 창을 닫기 시작했다. 동일한 사건을 전혀 다르게 해석하고 상반된 처방을 내놓는 신료들의 ‘당파적인’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을 뿐더러, 끝없이 왕을 가르치려 드는 유학자들의 불손함도 여간 고역스럽지가 않았다. 선조가 유교 지식인들의 장황한 ‘훈왕적(訓王的) 언설’을 막아내는 방법은 한 가지였다. 그들로 하여금 모든 말을 쏟아내게 하되, 일체의 답변을 주지 않고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하는 일. 그 것은 두 가지 효과를 가져왔다. 그 하나는 그로 하여금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비난을 피할 수 있게 했다. 뿐만 아니라 신하들로 하여금 두려워하며 스스로 입을 닫고 돌아가게 만들었다.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을 보면, 선조는 임진왜란 전후에 몇 차례 중요한 기회를 놓쳤다. 첫째, 선조는 전쟁 발발 전에 유성룡으로부터 당시 명망 높던 장수 이일(李鎰)을 경상우병사로 보내라는 건의를 받았다. “변고가 생기면 결국 이일을 보내지 않을 수 없는데, 이왕 보내려면 하루라도 일찍 보내 예비케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선조는 대답하지 않았고 “명장(名將)은 마땅히 서울에 있어야 한다”는 말에 따라 국왕을 호위하는 일을 맡겼다. (전쟁 발발 후 이일은 준비 안 된 상태로 경상도 상주로 내려갔다가 참패했다.)

둘째, 유성룡은 선조에게 방어체제 개혁을 제안했다. 조선의 현실에 안 맞는 ‘제승방략(制勝方略)’ 대신 ‘진관의 법(鎭管之法)’을 복구시키자는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진관지법’은 평소 지역 단위 군사들의 독자적 전투능력을 중시하는 진법이다. 지역별로 훈련을 받은 군사들이 유사시에 현지 상황에 맞게 전투를 전개해 적을 후방에서 교란하는 방어체제인 것이다. 반면 을묘왜변(명종10, 1555년) 이후 시행된 ‘제승방략’은 적의 침입 경보가 내려지면 원근의 군사들을 한 군데 모이게 해, 중앙에서 파견된 장수의 지휘를 받도록 하는 방어체제인데 “장수 없는 군사들이 먼저 들판 가운데 모여 천리 밖에서 장수 오기를 기다리다, 장수가 제 때 오지 않고 적군의 선봉이 먼저 닥치면 놀라고 두려워해” 반드시 패할 위험이 있었다. 실제로 그런 문제점이 상주전투에서 발생했다. (* 유성룡의 이 말은 세심한 검토가 필요하다. 팔레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J. Palais 1997), 사후에 자기를 합리화하기 위해 유성룡이 부각시킨 '테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유성룡이 볼 때 선조의 가장 큰 실수는 평양을 포기한 것이다. 사실 선조가 서울을 떠난 것과 평양을 버린 것은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 부산진이 무너진(1592.4.12) 15일 만에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申砬)이 소서행장에게 패사(敗死)하고, “적군이 오늘 내일 사이에 도성에 들어갈 것”이라는 급보를 받은 상태에서 더 이상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실제로 선조 일행이 서울을 떠난 이틀 만에 소서행장과 가등청정이 한강을 건너 도성에 들어왔다.)

그러나 평양의 상황은 달랐다. 당시 평양성은 10만 명의 군사가 두 달 간 버틸 수 있는 4만 섬의 군량을 비축한 막강한 ‘병마도시’였다. 무엇보다 다른 것은 평양 민심이었다. 선조 일행이 경복궁을 떠나던 날 장수들은 달아나면서 “이 전쟁은 사람이 빚어낸 것(人災)”이라고 말했고, 백성들도 “이제야 학정에 시달린 원수를 갚을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녔다.

반면 평양의 군민들은 어가가 평양에 머무는 사이에(1592.5.3 - 5.11) “산골 속에 숨어 있던 늙은이, 어린이와 남녀 자제들을 불러 모으고 찾아내 성에 들어왔다.” 유성룡도 이 때문에 “오늘날의 사세는 먼젓번 서울에 있을 때와는 다릅니다. 서울은 군사와 백성이 모두 무너져서 지키려고 해도 지킬 수가 없었지만 이 성은 그렇지 않다”며 평양 고수를 주장했다. 하지만 선조는 왕비와 왕자들을 함경도 쪽으로 보내 왜적을 유인케 하는 한편, 자신은 명나라 국경에 가까운 의주로 피신했다.

'징비록' 초간본 원본(국보 제132호).

식량전쟁과 유성룡의 헌신적 노력

물론 유성룡의 <징비록>을 있는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역사는 기록한 자의 것이며 승리한 자의 입장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인할 수 없는 유성룡의 뚜렷한 공적이 있다면 그것은 군량미의 조달이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임진왜란은 사실상 식량전쟁이었다. 적침이 워낙 급박했기 때문에 국왕조차도 먹을 것이 없었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굶주린 백성들은 “아이를 서로 바꾸어 먹기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 재상 유성룡에게 맡겨진 중대 임무는 군량 조달이었다. 조정의 애초 계획은 3일분의 식량을 가지고 온 명나라 군대에게 세 군데(양책 · 용천 · 안주)에서 식량을 조달해 평양까지 도달케 하는 것이었다(선조실록 25/7/6). 그러나 평양성이 일찍 적의 수중에 들어가고 그 위의 정주성에도 곡식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면서 조정은 곤혹스런 처지에 빠졌다. 설상가상으로 명나라 장수 양병총이 “군량과 마초가 보급되지 않기 때문에 회군하겠다”고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 당시 “2천 명의 군사를 먹일 수도 없는” 열악한 여건에서(선조실록 25/6/16) 유성룡이 강구한 방안은 무엇이었나. 먼저 그는 정주 인근 창고의 곡식을 조사해 한 곳에 집결시켰다. 다음으로, 전라도와 충청도 아산의 곡식을 해로로 운반하게 했다. 그리고 곡식을 안전하게 운반할 운송책임자를 엄선했다. 공명첩과 면역첩을 발급해 자발적으로 곡식을 내놓도록 한 것도 효과가 있었다. 조명연합군이 치열한 평양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순신의 서해안 운송로 장악과 함께, 식량 지원을 위한 유성룡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음을 기억해야겠다.

그러면 <징비록>을 통해 유성룡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자강(自强)의 국가경영’이다. 부용대의 옥연정사에 앉아(이곳에서 유성룡은 <징비록>을 썼다) <징비록>과 함께 대처의 <국가경영(Statecraft)>을 펼쳐 읽은 것은 실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과거의 세상에 정통한 사람만이 언제나 현재의 세상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는 대처의 말에서 유성룡의 책 제목, 즉 “지난 일을 징계[懲]해서 뒷날 근심이 있을 것을 삼간다[毖]”는 ‘징비(懲毖)’가 연상되었다.

옥연정사에 다시 읽은 <국가경영>

2001년 9.11 테러의 충격이 채 가시기 전(2002년)에 쓴 책의 서문에서 대처는 “요컨대 세상이 위험하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면서 특유의 ‘울타리론’을 펼쳤다. 대처에 따르면 “비극의 눈물로 깨끗이 씻긴 눈으로 훨씬 더 선명하게 이 세상을 바라보면” 결국 “좋은 울타리만이 좋은 이웃을 만들어 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위험과 분쟁이 잠복해 있는 이 폭력의 세계에서 개인을 가장 잘 지켜줄 수 있는 것은 곧 국가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울타리 안의 정부가 할 가장 중요한 책무는 “인재들로 하여금 재능을 꽃 피울 수 있는 틀을 만드는 것”이라는 게 대처의 결론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유성룡만큼 인재의 가치를 귀하게 여긴 정치가도 드물다. 그는 1566년에서 1598년까지 32년 간 관직에 있었는데, 이 짧지 않은 관직생활 동안 이순신을 비롯해서 권율 · 고언백 · 이성중과 같은 출중한 인재들을 기용했다(송복 2007, 450). 그가 인재를 발탁하는 기준은 단 하나, 자강(自强)의 능력을 갖췄는가였다.

미수 허목이 지적했듯이, 서애가 세우려고 한 나라는 우리 백성을 우리 스스로 지켜낼 수 있는 힘 있는 국가였다. 그는 누차 국왕에게 “명나라 군대는 믿을 수 없으니, 군사를 교련하여 자강할 계획을 세울 것(王師不可恃也 請治兵敎鍊 以爲自强之計)”을 요청했다(승정원일기 1882년 9월 5일).

그가 말하는 ‘자강지계(自强之計)’는 크게 세 가지로 첫째, 근본을 굳게 하는 것(固本), 둘째, 비용을 절약하며 저축하는 것(節用 積儲), 셋째, 군사를 선발하여 훈련시키는 것(選兵 敎訓)”이었다(허목 1997, 동서기언).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첫째 조건으로 나라의 근본, 즉 백성들의 삶의 기반을 튼튼히 하여 그들의 신뢰를 얻어 내는 일이다. 이 점에서 임란 초기 선조 일행이 백성들에게 서울을 지키겠다고 해놓고 밤사이에 도망친 일이나, 평양 백성들을 속이고 평양성을 탈출한 일은 스스로의 발밑을 허문 셈이다.

<한한대자전(韓漢大辭字)>을 보면 ‘굳셀 강(强)’은 ‘지경 강(疆)’과 상통한다. 지경, 즉 국경을 지키는 큰 짐승은 굳은 활[弓]을 자유자재로 쏠 만큼 힘이 세지만, 동시에 어떤 것도 소화해 낼 수 있는 능력이 탁월하다. 지경 안의 논밭(土)이 질서정연하게 다듬어져 있는 모습(畺)이 그것을 가리키는데, 한마디로 단단한 외형(국방) 못지않게 왕성한 소화능력(내부 통합)을 갖추는 자야말로 강한 존재이며 강국(强國)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자기로부터 시작하는 징비(懲毖)여야

유성룡은 <징비록>의 도처에서 징비(懲毖)의 취지를 언급했다. “이 내용을 다시 기록하는 것은 후손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우유부단한 국왕과 겁쟁이 장수들, 그리고 훈련되지 않은 병사들이 전쟁을 만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그는 작심한 듯 생생하게 기록했다.

그런데 <징비록>을 덮을 때가 되면 무언가 개운치 않는 찜찜함이 남는 것은 왜일까. 서애 자신은 조선형 방어체제인 진관체제를 제안했건만 국왕이 채택하지 않아서 병사들이 패퇴했고, 어가가 평양성을 버리고 떠난 것은 정적 정철의 강력한 주장 때문이었으며, 그의 친구 김성일의 ‘왜적 불침입설’조차도 인심의 동요를 방지하기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변론이 아닌가. 결국 나라는 잘못 운영되었으나 정승이었던 자신이나 자기 친구가 책임질 일은 아니라는 주장인 셈이다.

찬탄의 박수를 멈추고 손가락을 짚어가며 선명한 눈으로 책을 다시 들여다보니, 어느 곳에도 ‘이 점에서 내가 실수했다’고 고백한 대목을 찾을 수 없다. 자신에 대한 통렬한 반성 없는 징비가 얼마나 울림을 줄까 하는 아쉬움으로 문득 뒤를 돌아보니, 병산서원 만대루(晩對樓)의 현판이 새삼 아른거렸다. “모름지기 해가 질 무렵에야 푸른 절벽은 마주할만하나니(翠屛宜晩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