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에 겐자부로 지음|정수윤 옮김|위즈덤하우스|256쪽|1만4000원

“‘나만이 지닌 책의 네트워크가 있다’ ‘이런 작가들의 책을 읽고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다’와 같은 구조도가 살면서 차츰 생성되는 것이죠. 그게 지속적으로 책을 읽는 것일 터인데, 제 나이쯤 되니 제 삶이 다른 무엇보다 이 책들과 함께해왔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이 정도의 질과 양의 책이었구나’ 나아가 ‘내 생애도 이 정도의 일생이었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동시에 ‘그래, 분명 이런 인생이었지’ 하는 그리운 감정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1994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의 원로 작가 오에 겐자부로(80). 50년 넘게 소설을 써온 저자는 자신이 걸어온 인생 여정을 책을 통해 돌아본다. 그가 감명 깊게 읽은 책들은 긴 소화과정을 거쳐 그의 인생, 문학 작품 속에 녹아들었다. 아홉 살 때 처음 읽은 허클베리 핀의 모험부터 에드거 앨런 포의 시, 블레이크의 예언 시, 일리아스, 단테의 신곡까지. 그는 “과연 이 책들이 나라는 인간과 이어져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다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책 소개가 아니다. 책을 대할 때 어떤 자세로 읽을 것인지 깨우쳐주는 원로 작가의 ‘독서관’에 대한 이야기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정보를 얻는 것과 같은 레벨이 아닙니다. 책을 읽음으로써 책을 쓴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한 인간이 생각한다는 건 그 정신이 어떻게 작용한다는 것인지 알 수 있어요. 이를 통해 사람은 발견을 합니다. 지금 내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에 맞닥뜨리고 있는지 깨닫고, 결국은 진정한 나 자신과 만나는 것이 가능해지지요.”

그가 소개한 독특한 독서법은 색연필 독서법이다. 그는 두 자루의 색연필을 사용해 책을 읽었다. 먼저 번역서를 읽으면서 외우고 싶은 구절, 번역이 이해되지 않은 구절을 서로 다른 색으로 표시했다. 그리고 원서와 사전을 놓고 일일이 대조하며 그 구절들을 분석했다. 사전에 한 가지 단어에 딸린 여러 의미마다 일일이 대조해보며 가장 적합한 느낌을 찾았다. 그렇게 자신만의 언어로 체득한 구절을 머리와 가슴에 새겼다. ‘오에 겐자부로 스타일’의 문학은 그토록 치열한 독서 과정에서 영감을 얻어 탄생했다.

“외국어 책을 읽는 것과 일본어 소설을 쓰는 것이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여운을 남깁니다. 어떤 소설의 근본적인 톤, 음악으로 보자면 선율 같은 것이 떠오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문체’라고 부릅니다. 소설의 스타일이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며, ‘grief(비탄)’라는 작은 단어 하나에서 문장으로, 이어서 작품 전체로 전개됩니다. 나아가 한 사람의 소설가가 지닌 인간을 바라보는 견해, 사고방식, 소설가로서뿐만 아니라 인간 본연의 자세와도 이어지는 것이죠. 그것이 ‘문체’이며, 결국 우리는 이것을 읽어내기 위해 소설을 읽고 소설로 쓰기도 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끊임없이 새로운 독서법을 시도하고 또 실천했다. 3년마다 읽고 싶은 대상을 새로 골라 그 작가, 시인, 사상가를 집중해서 읽어 새로운 영감을 얻었고, 과거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재독(再讀)은 ‘전신 운동’처럼 여겼다고 소개한다. 고전을 읽는 즐거움에 대해선 이렇게 말한다.

“정신 차리고 지속적으로 책을 읽어나가면, 저절로 고전이 한 권, 두 권, 그것도 일생에서 아주 소중한 무언가가 될 작품이 여러분에게 다가오기 마련입니다. 그건 정말 신기할 정도예요. 어렵사리 만난 고전이 손에서 멀어져 갈 때도 있습니다. 제 경우엔 십 년이나 십오 년쯤, 무엇보다 소중한 고전을 읽지 않고 살았던 날도 가끔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기회가 생겨 그 책이 다시 제게 돌아와요. 책을 읽는다는 것과 살아간다는 것의 관계가 무척 신기하고 재미있다고 여겨지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이미 ‘다 읽었다’고 생각했던 책을 내가 정말 ‘읽은’ 것인가, 책장에 꽂았던 책을 다시 손에 들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