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파산제도는 200년 전 텍사스 주에서부터 시작했다. 가뭄 등 자연재해 때문에 흉작이 들면 빚을 얻어 농사를 짓던 농민들이 속절없이 무너져 야반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대규모 줄 파산이 이어지자 텍사스 주 의회는 긴급 빚 탕감을 하도록 조례를 만든다. 자연재해로 인해 대규모 부실이 반복적으로 발생하자 주 단위에서 수시로 이러한 빚 탕감이 이루어지다가 1930년대 들어 파산과 개인회생을 법제화하는 연방법이 만들어진다.

이른바 BRA78(Bankruptcy Reform Act 78)로 알려진 파산개혁법이 1978년 통과되면서 채무자의 파산과 개인회생이 쉽게 되고 미국의 금융시장은 혁명적 변화를 겪게 된다. 쉽게 말하자면 금융기관이 비가 왔을 때 우산을 빼앗아 가는 관행을 근본적으로 바꾼 것이다.

나는 2000년경부터 이러한 미국식 제도를 받아들여 과감한 파산 및 개인회생제도를 도입하자고 주장해왔다. 제도 대부분을 미국식으로 받아들이고자 주장하면서 이렇게 시민들의 편의를 위한 제도의 도입은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의 주장은 특정 집단을 위한 주장일 뿐임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관료들과 금융당국은 과거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런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금융자본주의가 발전한 미국에서 왜 이런 제도를 도입했을까? 은행의 건전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 기업이나 개인의 새 출발(Fresh Start)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전환은 부실 대출의 책임은 금융기관에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이러한 제도의 전환은 오히려 금융시장을 건전하게 만드는 효과를 냈다. 대출이 부실화되었을 때, 쉽게 파산이나 개인회생 절차에 들어가게 되면 금융기관의 손실이 늘어난다.

그래서 이제는 금융기관이 대출을 해주기 전에 철저히 신용평가를 해서 대출을 해주게 된다.
이러한 미국식 기준에 따르면 한국의 은행들은 아직도 전당포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담보가 있으면 쉽게 대출을 해주지만, 신용평가를 제대로 못 하는 기관이 전당포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국제금융시장에서는 이러한 규칙이 없다. 그래서 그리스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이다.
국가 내 제도를 확장해서 적용한다면 그리스에도 회생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그래서 나온 제안이 이른바 헤어컷(Hair Cut, 금융상품의 가치를 현재 가치에 맞게 재조정하는 것)이다. 원리금 일부를 탕감하자는 것인데 여기에 상환 기간을 늘려서 그리스의 상환능력에 맞도록 상환할 수 있게 하자는 제안이다. 그리스의 상환능력을 넘도록 대출을 해 주었다면 그것은 금융기관의 책임이고, 따라서 금융기관에도 공동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트로이카는 비겁하게도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철저히 금융기관의 이해를 대변하며 그리스에 가혹한 조건만을 부과했다. 2008년 이후부터 구제금융은 계속되었지만,
그리스 경제는 계속 나빠졌고 결국 2015년에 와서도 그리스 문제는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것이다.

마셜플랜에 의해 구제금융을 넘어 적극적인 경제 회생 자금을 공급받은 독일이 그리스에 가혹한 조치를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다.

지하에 있는 케인스가 통탄할 일이며 배은망덕한 조치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