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생. 부모세대가 일군 산업화의 기반 위에 IT산업의 주역이 되었다. 부모세대의 눈물과 웃음을 보고 자랐고, 그 혜택을 입었고, 이제 50대 중반을 맞았다. 정신적 뿌리를 부모세대와 같은 땅에 뿌리박고 있지만 자식들과는 다른 땅을 딛고 살고 있는 듯 느낀다. 부모세대와 마찬가지로 자식교육에 모든 것을 바쳤다. 은퇴를 몇년 앞두고 눈 앞에 닥친 긴 노년을 마주하며 불안해 하고 있다. 흔히 ‘학력고사세대’라 불리는 1962년에 출생한 사람들의 인생이야기를 통해 한국 경제의 과거와 현주소를 살펴보고 미래를 조망해 보고자 한다.

1970년대 중반. 한국은 산업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고, 일자리와 자식교육을 위해 부모들은 도시로, 서울로 몰려들었다. 강원도 속초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이희성(1962년 6월생) 전 인텔코리아 대표(이하 존칭생략)도 이런 거대한 사회변화의 강물에 올라타 있었다.

글로벌회사에 일반 사원으로 취직해 내부승진으로 CEO가 된 ‘직장인의 신화’ 주인공 이희성은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던 시대(가난한 집안에 태어나도 본인의 능력으로 성공할 수 있던 시대 )’의 대표적 1962년생 중의 한명이다. 그는 10년 동안의 인텔코리아 CEO직을 그만두고 백수 3개월을 넘기고 있었다.

지난 7월 22일 오전, 이희성의 집근처인 목동 파리공원 인근 커피숍에서 만났다.

이희성은 2015년 4월 30일 24년간 몸담았던 인텔코리아를 떠나 벤처캐피탈 사업을 구상 중이다.

‘Integrity Global Korea 사장 이희성’. 이희성이 기자에게 건네준 명함이다. 그는 얼마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또 다른 외국 기업의 국내 지사장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런데 회사 이름에 ‘Korea’라니, 벌써 지사장이 된건가.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이희성은 “친구가 외국에서 들여온 과자를 납품하는 사업을 구상 중인데 나에게 대표를 맡아달라더라”며 “직원 하나 없이 사장 혼자있는 회사”라고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이희성처럼 그의 친구들도 퇴직을 앞두고 있거나 이미 퇴직한 경우가 대다수다. ‘100세 시대’, 50대 중반은 사회생활을 그만두기엔 너무나도 이른 시기다. 이희성은 “내 경력을 이용해 퇴직하여 새로 사업을 시작하는 친구 일도 도와주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희성이 본격적으로 준비중인 사업은 벤처투자다. 그는 “노후 걱정할 필요없을 정도의 돈은 모았다”면서도 “아직 20년은 더 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미국에서 자금을 유치해 국내 유망 벤처에 투자하는 사업을 할 생각”이라고 했다.

“초기기업은 투자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투자금의 엑싯(출구·Exit)전략도 중요하다. 초기기업에 투자하여 육성하는 것부터 기업공개(IPO)나 인수합병(M&A)까지 전 과정을 돕는 것이 목표”라고 그는 새 사업에 대한 포부를 드러냈다.

◆ IT산업 호황에 힘입어 일반사원 입사 14년만에 CEO 올라

이희성은 한국 IT산업 발전의 큰 흐름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1991년 인텔코리아에 엔지니어로 입사해 44살 되던 2005년 CEO에 올라 ‘직장인 신화’의 주인공이 됐다. CEO 취임 후 2015년까지 10년간 인텔코리아를 이끌었으니 평사원 때부터 계산하면 1990년 설립된 인텔코리아 역사의 90%이상을 함께 한 셈이다.

그는 인텔에 입사할 때만해도 인텔의 가능성을 알지 못했다. “인텔에 가겠다고 처음부터 마음을 먹은건 아니다. 다만 금성전기(현 LG전자)에 다니면서 군사용 무전기 디자인 업무를 할 때 무전기에 사용되는 엄청나게 비싼 부품 대부분이 인텔에서 만든 것이었다. 마침 인텔이 사람을 뽑는다는 신문 공고가 떴다. 인텔을 잘 모르지만 이런 부품을 만드는 회사면 좋은 회사라고 생각하고 갔다.”

이희성은 1991년 인텔코리아 사원으로 입사해 14년만인 2005년 44세의 나이로 인텔코리아 CEO직을 맡았다. 그는 인텔코리아 CEO직을 10년간 유지했다.

이희성의 성공기는 한국의 개인용 컴퓨터(PC) 산업의 성장과 정확하게 겹친다. 그가 인텔에 입사하면서 맡은 첫 업무는 회사내 컴퓨터 네트워크 구축이었다. 기존에 쓰던 대형컴퓨터(메인프레임)와 터미널(개인용 컴퓨터가 대중화 되기 전에 사용하던 단말기) 위주의 전산 시스템을 상대적으로 고성능의 개인용 컴퓨터(클라이언트)와 서버를 연결해 사용하는 시스템으로 바꾸는 일이었다.

이희성은 “1991년 당시는 메인프레임 컴퓨팅에서 클라이언트 서버 컴퓨팅으로 변해가던 도입기였다”며 “50노드 규모의 사무실 컴퓨터에 케이블을 하나씩 연결해 회사 전반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통신망이 마비될 때마다 복구하는 일을 했다"고 회고한다.

1994년 입사 3년만에 이희성은 영업직으로 전환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IT산업의 한가운데로 뛰어든다. 이희성이 처음 팔았던 제품은 네트워크 관련 장비였다. 이희성은 2014년에 발간한 자신의 책 ‘리더스로드’에서 “새롭게 옮긴 조직은 랜카드, 프린트서버, 라우터등 인텔에서 만든 네트워크 장비들을 파는 곳이었다”며 “이때는 컴퓨터 네트워크의 전성기였다. 정말 영업이 잘 됐다”고 회고했다.

당시 이희성이 하던 일은 새로 컴퓨터 네트워크를 구축할 기업의 네트워크 담당자를 만나 인텔의 네트워크 장비를 구매하도록 설득하는 일이었다. 은행 등의 금융권이 주고객이었다. 인텔 제품의 영향력이 워낙 막강해 삼성전자를 대리점으로 둘 정도였다.

그는 ‘리더스로드’에서 “당시 인텔은 직접 제품을 판매하지 않고 대리점을 활용했다. 워낙 제품의 영향력이 크다 보니 삼성전자를 대리점으로 둘 정도였다. 대리점 직원 수도 상당히 많아 이 사람들을 다 모아놓고 제품 판매와 관련해 2박 3일 동안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신나게 어울려 놀았던 기억도 있다”고 서술했다.

◆ IMF 사태로 PC방 열풍...휴대전화 대중화로 매출 정점 올라

1997년 말, 한국이 겪은 IMF사태의 쓰나미는 이희성에게 오히려 기회가 됐다. IMF 여파로 정리해고와 명예퇴직의 광풍이 몰아쳤고, 그 여파로 창업에 나선 사람들이 대거 PC방을 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무렵 PC방 열풍의 뒤에는 초고속 데이터 통신이 가능한 통신망과 그에 기반한 인터넷 사용자의 폭증이 있었다.

PC방 개업 열풍은 개인용 컴퓨터의 수요 폭발로 이어졌다. 이희성은 이 기회를 이용해 ‘공짜 PC’ 이벤트를 기획해 대성공을 거둔다. 이희성은 ‘리더스로드’에서 “공짜PC 이벤트를 통해 데이콤은 가입자를 확보하고 외환카드는 고객을 얻었다. 현주컴퓨터는 컴퓨터를 많이 팔았다. 소비자는 저가로 인터넷이 되는 컴퓨터를 가질 수 있었다. 모두가 윈윈하는 기획이었다"라고 회상했다.

비슷한 시기에 진행된 또 하나의 큰 산업적 변화의 물결에서 이희성은 기회를 만난다. 바로 휴대전화 대중화였다. 한국의 휴대전화는 1996년을 전후해 기술적 제도적 정비를 마치고 폭발적 성장기에 접어든다.

1969년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천진초등학교 1학년 운동회 때 사진. 이희성 전 사장은 2남 1녀 중 장남이다. 옆에 있는 사람은 남동생이다.

1996년 한국이동통신과 신세기통신이 디지털 방식의 CDMA 서비스를 시작했고, 같은 해 사업자(한국통신프리텔, LG텔레콤, 한솔PCS) 선정을 거쳐 1997년부터 PCS 서비스가 시작됐다.

이후 이동통신 사업자가 단말기 가격을 보조해주는 제도 등에 힘입어 휴대전화 시장은 빠르게 성장했다. 그 결과 삼성전자, LG전자, 펜텍&큐리텔, 모토로라 등 핸드폰 단말기 공급자들도 호황을 맞게 된다.

누구나 핸드폰을 가지고 다니는 시대, 이희성은 핸드폰에 들어가는 메모리를 공급하는 회사에 있었다. 2002년 반도체를 포함한 한국의 통신관련 비즈니스를 총괄하게 된 이희성은 2004년부터 핸드폰에 들어가는 메모리 영업에 성공해 1년만에 통신부문 매출을 4배로 키웠다. 이희성은 그 결과 모토로라코리아에서 사장직 제안까지 받았다.

이희성은 모토로라코리아 사장으로 가는 대신 인텔코리아에 남는 것을 선택한다. 대신 인텔은 2005년 이희성을 인텔코리아의 CEO로 임명했다. 이희성은 이 때의 선택에 대해 “모토로라는 인텔에서 만난 주요고객들과 경쟁하는 입장에 있던 기업이었다. 지금까지의 고객을 적으로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 “스마트폰 시대 접어들며 회사와 개인에 시련 닥쳐”

이희성과 인텔에게 성공을 가져다 준 컴퓨터와 휴대전화의 발전이 그들에게 시련으로 바뀐 것은 아이러니다.

“나의 커리어는 삼성전자의 성공과 연결돼 있다. 삼성전자, LG전자가 인텔의 메인 고객이었으니까. CEO 5년차(2009년)까지 나의 몸값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2009년까지만 해도 삼성전자와 LG전자의 매출증대는 데스크탑과 노트북같은 고전적인 컴퓨터와 비(非)스마트폰 휴대전화의 판매 증가에 따른 것이다. 곧 삼성전자와 LG전자의 매출 증대는 CPU와 메인보드, 메모리 반도체등을 공급하던 인텔의 매출 증대로 이어졌다.

그러나 컴퓨터와 휴대전화를 융합한 새로운 기기인 스마트폰, 태블릿PC 등이 등장하면서 컴퓨터와 비스마트폰 휴대전화의 점유율은 위협받기 시작한다. 게다가 삼성전자는 스마트폰에 적합한 메모리 반도체 기술을 직접 축적해 인텔을 위협했다. 결국 인텔의 매출도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이희성은 “인텔코리아는 매출 발표를 하지 않지만 내가 CEO 8년차였던 2012년에 매출 최고점을 찍었다” 고 말했다.

인텔이 산악인 엄홍길 대장과 함께 2014년 네팔 오지 마을에 초등학교를 짓는 '휴먼스쿨 프로젝트' 진행 당시의 모습.

이런 시대의 흐름을 미리 감지한 이희성은 2009년부터 3년간 인텔코리아를 뛰어넘어 인텔의 아시아 총괄역으로 도약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희성의 든든한 배경이던 경영진이 건강 등의 이유로 하나둘씩 인텔 본사를 떠났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텔 본사는 이희성의 인텔코리아를 거치지 않고 삼성전자와 직접 거래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꾼다. 휴대전화와 컴퓨터 시장의 폭발적 성장으로 삼성전자는 이미 예전의 삼성전자가 아니었다. 델, HP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글로벌 기업이 된 것이다.

“삼성전자가 커지기 시작하자 인텔 본사에서 삼성 담당을 따로 둔다고 했다. 본래 인텔 본사는 덩치가 큰 애플, 구글, 델, HP, 아수스 등을 직접 관리한다. 만약 본사에서 나에 대한 신뢰가 컸다면 나에게 계속 삼성전자를 맡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는 건 회사가 드디어 나의 밸류(가치)를 낮게 보기 시작한다는 신호였다.”

공교롭게도 인텔 본사가 직접 관리를 시작하자마자 인텔의 삼성전자에 대한 실적은 악화됐다. 삼성전자가 ‘모바일 우선’으로 사업전략을 바꿨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2012년 IT솔루션사업부를 폐지하고 PC사업을 무선사업부 산하로 통합하는 조직개편을 발표했다.

PC의 시대가 가고 모바일 컴퓨팅의 시대가 온다는 것을 알리는 징조였다. 이희성이 인텔코리아에 입사해 네트워크 장비 영업을 했던 1990년대 중반 삼성전자가 인텔의 대리점 역할을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상전벽해 같은 변화였다.

◆ “운칠기삼...군대에서의 경험이 내 인생에 결정적”

이희성의 IT산업 인생에서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은 군대였다. 1981년 서강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한 그는 공부보다는 연극에 빠져 있었고 2학년 때 학사경고까지 받았다. 1975년 이희성이 중학교 1학년 때, 속초에서 배를 팔아 자식교육을 위해 서울로 왔던 부모님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이희성의 인생에서 연극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그는 CEO에서 물러난 이후인 지난 5월 서강대학교 개교 55주년 정기공연에서 안톤 체호프의 ‘벚꽃 동산’을 각색한 ‘사쿠라 가든’에서 열연을 펼쳤다.

이희성은 어머니의 결심으로 군대에 입대했다. “육군통신분과 특수병으로 발탁돼 18주간 통신에 대한 기초이론을 배웠다. 그때만 해도 군대통신기술은 국내 최고 수준이었다. 지금으로치면 KT실무기술진들이 하는 것을 군대에서 했다.” 이희성은 이를 계기로 1988년 대학 졸업후 금성전기에 입사했다.

“금성전기에 입사해 3년 정도 연구개발실에서 일했다. 하지만 내 성향이 아니었다. 연극을 하듯이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는 것이 나에게 행복하다는 것을 알게됐다. 외국에 군사용 무전기, 유도탄 통제 장비를 파는 해외영업부에서 일하고 싶던 이유였다.”

마침 인텔에서 사원채용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학과 군대, 회사생활 속에서 꾸준히 공부한 영어는 외국계 회사로 가서 의사소통을 하는데 자신감이 있었다.

이희성은 인텔코리아 CEO로 재직할 때 많은 일화를 남겼다. 인텔5세대 듀얼코어 프로세서 출시장에 가죽점퍼를 입고 할리데이비슨 오토바이를 몰고 등장하기도 했다. 연극 무대에 올라 연기를 하고, 드럼을 연주하고, 회사 파티에서 살사춤을 추기도 했다.

그에게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을 평가해 달라고 했다. “운이 좋았다. 인생이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 한다면, 기삼(技三)이 있으면 운칠(運七)이 작동한다. 난 운칠이 맞았던 사람이다.”

이희성은 1남2녀를 두었다. 26살인 큰 아들은 외국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다 그만두고 군대 다녀온 후 무엇을 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이희성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아들이 걸었으면 하는 마음도 숨기지 않는다. 최근 관심을 갖고 있는 벤처투자 때문인지 아들의 창업을 바라기도 했다. 이 시대 50대 아버지가 자식에 대한 기대와 고민을 그도 가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