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 이타성 연구로 국내 경제학자로 처음 사이언스 논문 게재

진화론에 따르면 나를 희생해 남을 돕는 것, 즉 이타적인 행동은 정상 범위 밖에 있다. 이타적인 행동은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는 이기적인 행동보다 손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 사회에서 뿐 아니라 동물 세계에서도 본인을 희생해 남을 돕는 이타적 행동은 쉽게 목격된다.

최정규(48)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는 이에 대해 “집단을 위해 희생하면 자신은 손해를 보지만, 희생의 결과 자기 집단이 다른 집단과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된다”며 “집단을 위한 자기 희생이 이타적 행동으로 진화했다”는 설명을 내놓았다. 최 교수와 그의 지도교수 새뮤얼 보울스(Bowles) 미국 산타페연구소 교수는 수만년 전 20개 부족이 진화하는 가상의 상황을 추적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이용해 이러한 가설을 입증했다.

논문에 따르면 이타성(altruism)과 자기집단중심주의(parochialism)가 결합된 ‘자기집단중심적 이타성(parochial altruism)’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집단에 비해 더 많은 자손을 퍼뜨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에 헌신적이지만 다른 공동체 구성원에는 배타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속한 집단은 다른 집단과 경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논문이 2007년 10월 세계적인 과학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실리며 최 교수는 학계로부터 크게 주목 받았다.

최 교수는 시장이나 제도에 집중하는 주류 경제학 흐름에서 조금 벗어나 인간 행동을 연구하는 행동경제학자로, 기존 경제학이 다루지 않았던 ‘이타성’을 주로 연구하는 국내 행동경제학의 권위자다.

인터뷰는 일산 자택에서 진행됐다. 최 교수가 연구실로 쓰는 방은 물론 거실 전체가 책으로 빽빽했다. 최 교수는 직접 원두를 갈아 지글지글 아메리카노를 끓여 내왔는데, 커피향이 훌륭했다. 인터뷰는 꼬박 세시간이 걸렸다. 이야기가 재밌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인터뷰가 끝나고 필기한 걸 보니 공책 10장이 넘었는데, 따뜻한 대학 교수님의 강의를 들은 것 같았다.

◆ 경제학적 이타성 연구는 ‘퍼즐 맞추기’

서울대 경제학과 86학번인 최 교수는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마친 뒤 박사 과정 중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며 이 분야 연구를 시작했다. 서울대 대학원에 다닐 때에는 정치경제학에 관심이 많았다. 기업 내 노동자의 참여가 보장된 노사관계, 노동자에 소유권이 부여된 기업 구조 등이 그의 주요 연구 주제였다.

최 교수가 서울대 대학원에서 공부할 당시는 소련 사회주의가 붕괴했다. 시장과 제도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던 시절이었다. 이런 주제를 공부하며 당시 이 분야의 권위자였던 새뮤얼 보울스 교수, 허버트 긴티스 교수(미국 앰허스트 소재 매사츄세츠 주립대학교) 등을 알게 됐고, 이들과 직접 공부를 해보겠다는 생각에 유학길에 올랐다.

하지만 미국 메사츄세츠에서 최 교수가 선택한 것은 정치경제학이 아니었다. 보울스 교수나 긴티스 교수 모두 이런 주제를 떠나 새롭게 인간 행동과 진화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최 교수는 “미국에 도착해 새로운 연구 주제를 접하게 됐고 이때부터 이타성, 진화에 대해 연구를 시작하게 됐다”며 “더 좋은 연구 주제를 잡게 된 셈”이라고 말했다. 최 교수의 연구 키워드는 인간 행동, 진화, 제도 세 가지다.

많은 경우 인간 행동이나 이타성, 진화라는 연구 주제는 생물학자와 인류학자, 사회학자의 연구 분야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경제학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진화론과 교우해 왔다. 근대 경제학의 창시자 알프레드 마샬도 “경제학의 핵심은 기계론적 사고보다 생물학적 사고에 있다”며 생물학적 방법론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그러나 20세기에는 경제학에 진화론을 결합하는 노력이 자취를 감춘다. 진화론이 인종주의 등과 결합해 우생학이나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이론으로 사용되며 진화론과 경제학의 교우가 어려워진 것이다.

그럼에도 1980년대 이후에는 ‘진화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제도와 규범의 등장, 확산, 소멸의 전 과정을 경제주체 간 상호작용을 통해 분석하려는 시도가 다양한 분야에서 등장한다. 그동안 신고전파 경제학은 인간이 이기적이며 완전히 합리적인 존재라고 전제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비합리적인 선택들을 기존 이론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지면서 행동경제학이 태동했다.

최 교수는 “경제학에서 이타성의 진화를 설명하는 것은 퍼즐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 교수는 “20세기 경제학자들이 엄격하고 통제 가능한 가정을 통해 시장과 제도를 연구한 이유는 인간의 본성에 의존하지 않고도 잘 작동하는 시스템을 그려보려 했던 것인데, 그러한 시도가 성공적이지 못했던 게 경제학자들로 하여금 다시 인간 본성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한 계기가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고전 경제학자들은 사회의 수많은 계약들이 완벽히 통제 가능하고, 계약 당사자가 완벽히 합리적으로 선택한 결과라고 설명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계약이 체결되고도 계약이 지배하지 못하는 부분이 존재하고, 비(非)계약의 영역은 때론 완전히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1980년대 경제학자들이 행동, 인간의 선호에 대해 생각하게 된 계기가 이것이다.

최 교수는 “고전 경제학에서는 인간의 선호를 건드리는 것이 일종의 금기였는데, 행동경제학자들은 인간의 선호를 연구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고 언급했다. 최 교수는 “기존 경제학에서 개인의 선호를 문제삼지 않는 것도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으며, 따라서 행동경제학에서 선호를 다루는 연구는 그만큼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말한다.

경제학에서 경제 주체(인간)의 선호를 문제 삼지 않는다는 것은 현실에서 문제가 있을 때 제도에서 문제를 찾고, 제도를 고침으로써 상황을 개선하겠다는 것으로, 문제를 개개인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겠다는 일종의 합의이다.

예를 들어 기존 경제학은 선호를 문제 삼지 않음으로써 청년 실업 문제를 볼 때 그 원인을 청년들의 눈높이로 설명하지 않고, 제도의 문제에 주목하게 해준다. 최 교수는 “이러한 점에서 선호를 건드리지 않겠다는 합의의 의의를 인정해야 한다”며 “인간 행동과 선호를 다루는 것은 엄격한 제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작업”이라고 이야기 한다.

◆ “높은 수준의 임금이 노동자의 성과 향상시켜”

이타성 진화에 대한 연구는 기존 제도 연구가 간과한 부분을 보완하는 역할도 수행한다. 최 교수는 “전통 경제학자들이 제도를 보는 관점은 모든 경제주체들이 물질적인 유인에만 반응한다는 것을 기본으로, 규제해야 하는 행동에는 벌금을 물리고 독려해야 하는 행동에는 인센티브를 부여하지만, 경제적 주체들은 경제적 유인 뿐 아니라 도덕감정에 따라 행동하기도 한다”며 “경제적 유인에 초점을 맞춘 기존 제도는 도덕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경제 주체들을 규율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논문 수, 인용 횟수 등 정량적인 평가를 통해 대학 교수를 평가하고 결과에 인센티브를 주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최 교수는 “이는 행위자(교수)가 경제적인 유인(인센티브)에 따라서만 행동할 것이라고 가정한 것인데 이러한 평가 방식은 그동안 자발적으로 이뤄지는 논문 연구를 하나의 ‘상품’으로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 내 성과급을 도입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최 교수는 “노동 시간 등 정량적인 부분은 노동 계약이 정할 수 있는 것이지만, 얼마나 좋은 성과를 낼 것인가는 명시적인 계약을 통해 규제할 수 없는 부분”이라며 “이런 불완전한 노동계약을 보완하기 위해 성과급을 도입한다면, 이는 결국 근로자가 도덕감정에 따라 자발적으로 수행하던 부분을 파괴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경제적인 부분에 치중한 인센티브 구조가 경제주체들의 이타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 인센티브 제도는 어떻게 보완돼야 할까. 최 교수는 한 예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조지 아켈로프 버클리대 교수의 ‘선물교환이론’을 설명했다. 아켈로프 교수에 따르면 기업이 통상적인 수준보다 더 높은 임금(선물)을 노동자에게 지불하면, 노동자 역시 계약되지 않은 더 높은 성과(선물)를 기업인에게 주는 호혜적인 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 최 교수는 “이런 호혜적인 관계 속에서 결과적으로 파이가 더 커지는 상황도 기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물론 선물교환이론은 계약 주체 간 상호작용이 있고 나의 선물에 상대가 반응(상대도 선물을 주는 방식으로)할 것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성립된다.

최 교수는 최근 이와 관련된 실험(공공재 게임·참가자들에게 10개의 자원을 주고 이 중 일부를 공공에 투자하도록 하면, 투자한 자원의 2배를 인원 수로 나누어 돌려받는 게임)을 진행하고 있다. 최 교수는 “공공재 게임을 참여자들이 동시에 진행하지 않고, 한 참가자가 먼저 자원을 내놓은 다음 자원을 받은 다른 참여자가 자원을 내놓도록 하는 방식으로 게임을 진행한 결과 참여자들이 내놓는 자원의 수가 더 많았다”고 설명했다. 상대방이 나에게 더 많은 자원을 줄 것이라는 기대, 즉 ‘사회적 신뢰’가 인간 행동에 중요한 요인이라는 점을 밝히는 과정이다. 최 교수는 “실험실에서 나온 결과는 상당히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 “앞으로도 이론 확인에 집중…현실 개입 여지 커질 것”

이 밖에도 최 교수는 근대사회에 걸맞는 도덕감정이 무엇인지도 연구하고 있다. 집단의 영달을 위한 개인의 이타성은 해당 집단에는 이롭지만 사회 전체적으로는 이롭지 않을 수 있다. 편협한 집단주의를 만들어 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 교수는 또 고고인류학을 주제로 한 논문도 작성해 최근 관련 학술지에 실었다. 진화 경제학을 연구하면서 축적한 고고인류학에 대한 지식을 활용한 연구다.

그동안 인류 역사를 설명한 통설은 농업 기술의 발전이 사적 소유 제도의 탄생을 촉진시켰다는 것이다. 농업으로 잉여자원이 생겨나고 이를 사적으로 소유하게 돼 관련 제도가 생겨났다는 가설이다. 하지만 학계에 보고된 다른 자료에 따르면 사냥하던 시절 인류의 영양 상태가 농업 공동체에 들어선 인류의 영양 상태보다 더 좋았다. 농업이 정착되며 생산성이 축적됐고, 이것이 사적 소유 제도를 발전시켰다는 기존 주장의 설득력을 약화시키는 연구 결과다.

최 교수는 생산성이 낮아도 농업이 정착될 수 있었던 이유와 과정을 추적했고, 그 결과 “농업의 높은 생산성(기술)이 사적 소유(제도)를 낳은 것이 아니라, 사적 소유(제도)가 낮은 생산성에도 불구하고 농업(기술)을 채택하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최 교수의 연구 중에는 지도 교수인 보울스 교수와의 공동 작업 결과물이 많다. 최 교수는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주저 없이 보울스 교수를 꼽았는데, “그와 연구하며 사회과학자로서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지 등 많은 영향을 받았다”며 “진정한 스승”이라고 말했다.

한편 최 교수는 “앞으로도 이타성의 진화를 이론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에 더 집중할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그는 “실험실에서 나오는 결과는 상당한 의미가 있지만, 그것을 기반으로 정책적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아직 그려지지 않는다”며 현실 문제에 대한 조언에는 말을 아꼈지만, “앞으로 이론이 발전하는 만큼 (이타성 진화 관련 연구가) 현실에 개입할 여지가 커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독자들에게 세 권의 책을 추천했다. 첫 번째 추천도서는 보울스 교수가 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책으로, 이 책은 경제학이 어떻게 인권이나 불평등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지를 보여준다고 했다. 두 번째 책은 경제학자 앨버트 O. 허쉬만이 쓴 ‘열정과 이해관계’였다. 경제학이 발전하면서 이기심의 비중이 커진 경제사상사를 다룬 책이다. 최 교수는 마지막으로 아담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의 일독을 권했다. 그는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가 아니라 이 시기 왜 여전히 도덕감정에 주목해야 하는 가에 대한 해답을 찾는 데 도움이 되는 책으로 추천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