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공기관이나 공기업 사장을 네 번째 하고 있다. 그래서 간혹 직업이 '공기업 사장'이라고 불린다. 이제는 한국전력 사장직도 임기 종반에 들어섰다. 공무원으로 출발한 내가 이렇게 '야전사령관'의 길로 가게 된 계기는 한 장의 사표(辭表)에서 비롯됐다. 산업자원부 차관보로 있던 2001년, 인생의 절정기인 50대 초반 나이에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으로 25년 공직생활을 마감한 것이다. IMF 외환위기 이후 엄청난 인사(人事) 적체, 정부가 바뀌면서 터져 나온 인사 파행, 공직생활에 대한 피로감과 회의 등이 사표를 낸 배경이었다. 여기에 '후진을 위한 용퇴'라는 약간의 영웅 심리도 있었고 바깥세상에 대한 동경(憧憬)과 도전심도 작용했다.

하지만 영웅이 된 듯한 기분은 얼마 가지 않았다. 매일 점심·저녁 위로 행사도 한 달쯤 지나자 모두 사라졌다. '대책 없는 백수'의 현실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가웠다. 시베리아나 마찬가지였다.

한두 달 지나면서 나에 대한 시선은 무관심을 지나 냉소로 바뀌었고 나는 잊힌 사람, 무모한 사람이 됐다. 20년 넘게 직장생활을 했으니 집에 저축이라도 좀 있는 줄 알았더니 아파트 이사 가면서 빚만 5000만원 있었다. 서서히 절박감이 밀어닥쳐 왔다. 그러면서 나 자신이 달라져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환익 한국전력 사장은 “공공 기관·공기업의 사장직만 벌써 네 번째 하고 있다”며 “이런 야전사령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한 장의 사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했다. 조 사장은 사표를 던진 후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길에 눈을 떴다고 했다.

수험생처럼 '공부만이 살 길이다'라는 각오로 닥치는 대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조간신문을 한 줄도 안 빼고 다 읽고 좋은 칼럼은 스크랩을 했다. 독서는 다독(多讀)을 했다. 정책 서적이나 경영, 소설, 인문학, 수필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았다. 야마사키 도요코의 '불모지대(不毛地帶)' 같은 소설을 통해 상상력을 키웠다. 나에게 신문과 책은 창의력, 아이디어의 원천이었고 세상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중요한 소통 창구가 됐다. 이러한 독서광(狂) 생활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데, 읽는 속도가 점차 빨라져 이틀에 한 권은 해치운다. 해외 출장 때 공항에서 3~4권 사서 비행기나 호텔에서 다 읽기도 한다.

그 무렵 신문에 기고(寄稿)도 시작했다. 서서히 인정을 받으면서 여러 군데에서 고정 필진 청탁이 들어왔다. 강연 초청도 가끔 있었다. 명강사가 되기 위해서는 '원고를 읽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강도의 즉석 스피치 연습을 했다. 각종 토론회에서 초청이 오면 부르는 대로 빠지지 않고 다 갔다. 어눌했던 내가 후에 '말 잘하는 법(말잘법)' 강연을 하기도 했는데 '초반에 승부를 걸어라', '핵심은 콘텐츠와 진정성', '마무리는 강한 메시지로' 같은 이론을 이때 정립했다.

이렇게 한 10개월이 지났을 때쯤 정부가 후원하는 인원 20명, 연간 예산 20억원 정도의 신설 민간기구의 대표 역할을 맡을 기회가 왔다. 이공계 활성화와 기술 인력, 기술 벤처기업 양성 등의 일을 하는 조직이었다. 이때 비로소 공직 울타리 안에서 안 보이던 게 보이기 시작했다. 사무관이 그렇게 높은 줄 몰랐다. 국장 이상은 하도 높아서 보이지도 않았다. 실무선 결정이 위에 올라가면서 번복(飜覆)될 확률이 5%도 안 된다는 것도 알게 됐고, 공직 내부가 얼마나 경직됐는지도 깨달았다. 울타리 밖 약육강식의 정글 속에 살려면 철저한 자기 관리와 실력 축적밖에 없다는 것도 절감했다. 직원들에게 절박함과 근성을 심어주기 위해 일을 몰아붙였다. '버럭 조바마'라는 별명까지 얻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2년 반 후 내가 떠날 때는 그 조직은 처음에 비해 인원 10배, 예산 100배로 성장했다.

이런 성공 사례가 당시 출범한 정부에 알려지면서 다시 정부에 차관으로 불려왔고, 1년 반 동안 정신없이 일한 후 물러났다. 다시 백수가 되어 1년 이상 놀다가 이번엔 수출보험공사(K-Sure) 사장으로 부임했다. 1년 후에 정권이 바뀌면서 물러나 다시 또 자유인 몇 개월, 그리고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사장 3년, 또 1년여를 쉰 뒤 프리랜서…. 나는 계속 후방과 전방을 왔다갔다했다.

새 조직을 맡으면 그 조직의 성격과 시대 상황에 맞는 경영 개념을 만들었다. 수출보험공사 때는 우리 돈이 해외에 투자돼 돈을 벌어야 한다는 '돈수출', KOTRA 때는 품질·가격을 종합해서 평가하면 우리 기업의 상품이 일본이나 중국보다 더 경쟁력이 있다는 '역(逆)샌드위치론'을 주창했다. 한전에서는 신에너지산업이 ICT 이후 세계의 먹거리가 될 것이라는 '제6의 물결'론을 도입했다. 이런 것들은 조직 통합에 큰 힘이 됐다. 특히 한전은 매우 어려웠다. 만년 적자와 전력 수급 불안, 송전탑 건설 갈등, 에너지 신산업 육성 등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이 모든 상황과 투쟁한 끝에 안정된 흑자 공기업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좀 고단하다. 또 자유세계로 가고 싶은 본증(本症)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한 장의 사표가 내 인생을 바꿨지만 후배들에게 절대 권하고 싶지 않다. 너무나 힘들고 멀리 돌아왔다. 이렇게 안 살아도 된다. 이제 서서히 그동안 소홀히 했던 가족들이 '가장(家長) 사표'를 쓰라는 말이 안 나오도록 챙길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조환익 사장은…

조환익(65) 한국전력공사 사장은 서울대 정치학과와 미국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한양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3년 행시 14회에 합격,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상공부 산업진흥과장, 청와대 경제비서실 부이사관, 통상산업부 산업정책국장, 산업자원부 무역투자실장·제1차관을 지냈다. 공직에서 물러난 후 한국수출보험공사 사장, 코트라 사장 등 공기업 최고경영자(CEO)로 일했다. 코트라 사장으로 재직 중이던 2010년 아시아무역진흥회의(ATPF) 의장을 맡기도 했다. 이명박 정부 말기인 2012년 12월 한국전력공사 제19대 사장이 됐다.